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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재발견<14> 남도문화의 중심고을, 나주
입력 : 2019년 12월 15일(일) 19:19


찬란한 역사와 영화 간직…'영산강 르네상스' 기대
금성관
풍요롭고 비옥한 영산강문화의 기반을 이루는 목사골 나주는 지난 1천여년 동안 행정과 군사, 교통과 문화 등에서 전라도 남부의 중심도시로 커다란 영화를 누려온 유서 깊은 큰고을이다. 역사적으로 마한시대에는 54소국 중 임소반국(臨素半國)과 신운신국(臣雲新國)이 나주·광주의 경계지역에, 불미지국(不彌支國)이 반남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백제시대에는 나주읍 일원에 발라군(發羅郡), 반남에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 남평에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 등의 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통일신라는 686년에 발라군을 통의군(通義郡)으로 고치고, 757년에는 통의군을 금성군(錦城郡)으로, 반나부리현은 반남현(潘南縣)으로, 미동부리현은 현웅현(玄雄縣)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초기인 940년에 금성군을 나주로 개칭하였고, 983년 전국에 12목을 둘 때 나주목이 되어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목(牧)으로의 승격을 계기로 종래 전라도 남부의 으뜸 도시였던 무주(광주)를 대신해 계수관(界首官)으로 등장하여 정치적·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나주는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같이 목으로써 전라도 남부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중기인 1589년 ‘기축옥사’로 불리운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인해 나주와 전주에 기거하던 호남의 주요 사림과 학자들이 거의 몰살을 당하여 지역인재들의 맥이 끊기게 되는 극심한 참화를 겪었다. 1755년에는 윤지(尹志)가 주도하여 영조임금을 비난하는 벽보를 객사 앞에 내거는 ‘나주 벽서사건’이 발생하여 여기에 연루된 다수의 선비들이 처형당하는 등 수난이 잇따랐다.

1895년에 관제개혁으로 나주군으로 개칭되었다. 다음해 새로운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져 13도제가 시행되고 각 도에 관찰사가 파견되는 체제로 바뀜에 따라, 광주가 새로이 전라남도의 관찰부 소재지가 되었다. 전남관찰부가 나주를 배제하고 광주에 자리잡게 된 것은 1895년 성인 남자의 상투를 자르게 하는 조치인 단발령(斷髮令)에 따른 극렬한 반발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당시 유림들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하였던 광주를 향후 전남지역 통치의 중심지로 결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96년 개설된 전남관찰부는 1910년 전남도청으로 개칭된 이래 100여년 동안 광주시 광산동에 2005년까지 존치되었다가 남악신도시로 이전하였다.

유서깊은 역사도시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재가 금성관(錦城館), 목사내아(牧使內衙), 정수루(正綏樓) 등으로 이루어진 나주목의 관아 건축물이다. 나주목의 객사였던 금성관은 나주시 과원동에 있는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의 일출목(一出目) 삼익공(三翼工) 의 주심포양식(柱心包)을 이루는 관아건물로 금년 10월 25일 전남유형문화재 2호에서 보물 제2037호로 승격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초기 나주목사 이유인(李有仁)이 건립한 것으로 1603년과 1884년에 중수하였다.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건물을 개조하여 군청의 청사로 사용되었고 이후 1963년과 1976년 두 차례에 걸쳐 완전히 해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관아건물 중 하나인 객사는 전(殿) 또는 궐(闕) 자를 새긴 전패·궐패를 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임금에게 올리는 의례인 망궐례(望闕禮)를 행하고, 지방을 방문한 관원을 접대하는 공간이다. 금성관은 나주 읍치(邑治) 역사성과 상징성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원래의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으며, 다른 객사와 뚜렷한 차별성을 띤 격조 높은 건물로 국가지정문화재로서 위상을 가지고 있다.

나주목사 내아는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보던 동헌의 정문인 정수루(正綏樓)에서 서쪽으로 약65m 떨어진 곳에 정남향으로 자리한 조선시대 목사가 거주하던 관사(官舍)로 건물의 명칭은 ‘琴鶴軒’(금학헌)이다. 본채와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문간채는 본채와 20m의 거리를 두고 전면에 자리잡고 있다. 중앙은 전퇴를 둔 5칸으로 왼쪽에서부터 대청 3칸과 그 밖의 여러 곳을 크게 고쳐서 원래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손님 접대를 위해 부엌 공간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언제 지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다만 대문 옆에 있는 문간채를 고종 29년(1892)에 만든 것으로 보아 살림집 역시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군수 관사로 사용되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지만, 객사와 내아가 함께 남아 있어 관아 건축의 원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인근에는 나주목문화관이 건립되어 지역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하였다. 최근 나주읍성 4대문과 성곽 일부의 복원사업이 완료되어 역사도시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고 있다. 1993년 복원된 남문인 남고문(南顧文)을 시작으로 2005년 동문 동점문(東漸門), 2011년 서문 서성문(西城門), 2018년 북문 북망문(北望門)이 차례로 완공되었다.
남고문


또한 나주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지방행정의 중심지이다 보니 나름 독특한 음식문화가 발달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나주곰탕이라 할 수 있다. 나주곰탕은 대구의 현풍곰탕, 황해도의 해주곰탕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곰탕으로 일컬어진다. 사골육수에 고기의 결에 따라 찢은 사태와 양지머리, 다진 파를 얹은 탕이다. 끓는 사골국물에 쇠고기를 넣어 익으면 건져서 결대로 찢거나 얇게 썰어 놓고, 면포에 거른 맑은 국물을 그릇에 담고 고기와 송송 썬 대파, 황백지단채, 다진 마늘, 고춧가루, 참기름, 통깨를 고명으로 얹고 소금을 곁들인다. 나주곰탕은 다른 지역의 곰탕과 다르게 좋은 고기를 삶아 국물을 만들어 국물이 맑은 것이 특징이다. 항간에서 나주곰탕을 유래를 해방 이후에 등장하였다고 보는 주장이 있는데, 조선후기 상업교역과 교통의 발달로 인해 주요 거점도시들에서 탕반(湯飯:국밥)으로 불리던 시장음식이 널리 보급되었던 사실을 보았을 때 그 기원에 대한 탐구는 좀 더 심층적으로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특산물로는 배가 있다. 조선시대에도 토종배가 있었으나, 본격적인 재배는 일제강점 초기에 시작되었다. 1910년 일본인 마쓰후지(松藤傳六)가 자국에서 개발된 품종인 신고, 금촌추, 만삼길, 장십랑 등을 들여와 식재하였다. 지형적으로 비옥한 황토지대에 물빠짐이 좋은 구릉지역이며 기후가 온난하여 최적지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1913년 송월동에 거주한 이동규씨가 과수원을 개설한 후 점차 재배면적이 확대되었다. 나주배가 나주의 명산물로 국내외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29년 개최된 조선박람회에 나주배를 출품하여 동상을 수상하면서 부터이다. 현재 재배면적 2천200ha에 전국생산량의 25%인 8만t을 생산하여 지역경제 발전에 한몫을 담당한다.

비단을 펼쳐놓은 듯한 보배로움이 가득한 고장 나주(羅州)는 이제 전라도 남부를 선도하는 중심고을로 다시 도약하는 제2의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다. 영산강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나주에서 천년의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남도문화의 뿌리를 찾고 이를 체계화하는 거대 프로젝트를 전개할 시점이다. ‘영산강 르네상스’라 일컬어도 될듯싶은 남도문예부흥사업을 기획하여 실행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그동안 소홀히 여겨왔던 천년왕국 마한문화에 대하여 치밀하고 체계적인 조사연구를 추진하고 그 성과를 기반으로 각종 교육 및 관광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작업을 지역적 차원에서 다함께 나서야 한다. 지난 시대의 찬란한 남도 역사와 문화의 영화를 간직하고 있는 천년 목사고을 나주의 화려한 부활과 번영의 구가(謳歌)가 하루라도 앞당겨지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김형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장

김형주는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사와 학예관으로 ‘광주의 전통음식’, ‘광주의 민요’, ‘광주의 설화(說話)’, ‘광주의 모정(茅亭)’ ‘광주의 동족마을’ 등 지역의 전통민속문화 현장조사에 참여했다. 남구 향등마을과 신창동 매결마을 지표조사에 참여해 도시 속에 잔존하는 전근대의 문화를 탐색하기도했다. 최근에는 도시생활민속 탐구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