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3(금)
현재기온 19.9°c대기 보통풍속 0.4m/s습도 93%

[무등의 시각] 순종은 선이 아니다

@한경국 입력 2020.06.25. 02:49 수정 2020.06.25. 15:07

"저는 단지 맡겨진 일을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도 않고 시킨 대로만 행동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히틀러의 충직한 부하 아돌프 아이히만. 그는 세계 2차대전 당시 독일 나치 친위대 장교였다. 그의 주 업무는 유대인을 기차에 태워 가스실이 설치된 수용소에 보내는 일이었다. 그의 가장 큰 실적은 가스실이 설치된 열차를 제작한 것. 보다 효율적인 학살을 위해 만들어진 열차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 법정에 서게 된 아이히만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신은 독일 제국의 선량한 시민이고, 국가가 법에 따라 내린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을 뿐이라고 죄의 짐을 덜어냈다. 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아이히만이 악마나 사이코패스 같은 괴물로 생각했으나 실제 법정에 선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멀쩡했기 때문이다. 특별한 범행 동기가 있지도,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극히 평범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를 검진한 정신과 의사들도 그가 매우 정상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그렇다. 그는 단지 일개 공무원이었고, 시키는 일을 해낸 것이 전부였다. 다만 무조건적인 복종을 했을 뿐이다. 복종해서 가스 열차를 만들고, 복종해서 수백만 명을 학살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20세기를 대표하는 유대인 출신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 이론을 떠올리게 된다. '악의 평범성'이란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악은 특별한 자만이 저지르지 않고 의외로 동기 없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평범하고 진부한 것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평범한 악은 타인을 생각하지 않은 태도에서 나온다. 남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함은 말하기의 무능과 행동의 무능을 낳고, 결국에는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악이 된다는 내용이다.

아이히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지 않았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수백만 명을 죽을 수 있는데 죄의식 없이 악행을 범했다.'악의 평범성'은 실험으로도 입증됐다. 순종적인 사람들이 나쁜 짓도 잘 순종해서 따라 한다는 것이다. 착하게만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종적인 사람들도, 주변이 악한 사람들로 가득하면 착하게 살기 어려웠다. 실제로 권위 있는 사람이 악한 일을 지시했을 때, 늘 말을 잘 들었던 순종적인 사람들은 악을 따랐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도 이 같은 경우의 사례는 널려있다. 학교, 직장, 가정, 이웃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공감하지 못한 채 자신의 입장만 늘어놓는 자들, 명령에 무조건 따르라며 강요하는 자들,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은 자들, 양심을 저버리고 무조건 순종하는 자들, 나쁜 일을 보고 방치하는 자들 등은 언제나 주변에 있다. 그만큼 인간의 악이라는 것은 가까운 곳에 있고 평범한 가면을 쓰고 있다.

그렇다고 불순종이 선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순종과 불순종은 선도, 악도 아닌 선택이다. 진정 바르고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하 관계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순종을 요구하기보다 설득으로 다가가야 한다. 남을 업신여기기보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공감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한경국 문화체육부 차장대우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srb.co.kr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