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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원의 트빌리시편지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 23.프로메테우스의 신화 어린 카즈베크산

입력 2020.04.16. 10:16 수정 2020.05.06. 15:43
신들의 분노도 꺾지 못했던 프로메테우스의 인간애
스테판츠민타 가는 길

오래 전 인도 북부의 자치왕국 라다크를 여행한 적이 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급경사의 낭떠러지를 옆에 끼고 위험천만한 고갯길을 지나가는 험난한 여행이었다. 아찔한 낭떠러지 쪽에 앉은 여행자들은 옆으로 눈을 돌리면 순식간에 몰려드는 무서움과 긴장감에 온몸이 굳어졌다. 몸서리치며 몇 시간을 숨 가쁘게 달리다 보면 두려움에 서서히 적응이 되었다. 심지어 신에게 운명을 맡긴 채 잠이 든 여행객들도 있었다. 지독한 두려움도 어느 순간이 되면 익숙해지고 무뎌지나 보다. 산다는 건 열정과 혼신을 다하다가 지치고 힘들면 체념했다가 다시 일어나서 걷기를 반복하는 것인가 보다. 여행이 생의 축소판이라더니 괜한 말이 아니다.

긴장하느라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이끌고 5천m가 넘는 험준한 고갯길을 넘어 라다크의 수도 '레'에 도착했다. 허연 뼈를 드러낸 듯한 앙상한 레의 산 위에서 마을을 바라본다. 오랜 시간 먼지에 쌓여 회색빛이 감도는 황톳빛과 집들. 그리고 수직으로 고개를 꼿꼿이 쳐든 미루나무가 도열하듯 서 있었다. 하늘의 별들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지상으로 내려와 지친 몸을 뉘이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라다크에서 달의 호수가 있는 스리나가르(Srinagar)까지 가는 길은 침묵 속을 걷는 유형의 길이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고요의 길에서 유목민을 만났다. 그들의 눈빛이 지상으로 내려온 별빛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유목민의 눈빛에는 속인들이 다다를 수 없는 평화와 정적이 깃들어 있었다. 정작 절절한 외로움은 온통 내 차지였다. 이 험한 곳에서 값싼 외로움으로 치장한 내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꽃과 귀향


트빌리시에서 스테판츠민다(Stepantsminda) 마을에 있는 카즈베크 산으로 출발하기 전날 불현듯 옛 기억이 떠올랐다. 바쁘게 살면서 기억 저편에 숨겨두었던 라다크를 여행했던 시간들이 눈앞에서 서성거렸다. 출발하기 전부터 이번 여행은 외로움과 동반할 여행이라고 미리 짐작하면 그전에 다녔던 비슷한 여행이 떠오른다. 과거의 기억일 뿐이고 이미 마음 안에서 떠났다며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불현듯 떠오르면 다시 긴장의 고삐를 바짝 틀어쥐어야 한다.

조지아의 스테판츠민다 여행과 라다크 스리나가르 여행은 사뭇 다르리라.

스테판츠민다의 카즈베크 산은 조지아에서 가장 유명한 여행지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고봉 위로 사람들의 발길이 쌓여 이제는 신화의 흔적들마저 지워져버린 곳.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가 신의 분노에 갇혀 있던 신화의 산. 바위 사슬에 묶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고통 속에서도 생명은 영원히 지속되었다. 재생되는 고통에 신음하는 신화의 산.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구해줄 때까지 3천년 동안이나 제우스의 쇠사슬에 묶여있었던 프로메테우스의 영혼의 부르짖음 때문일까? 스테판츠민다 마을의 카즈베크 산으로 향할 때 신들이 들려주는 깊은 저음의 코러스가 숲속 곳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카즈베크 산(Mt. Kazbek)은 높이가 5,047m이다.


이방인의 일기


흑해에서 카스피해까지 북서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코카서스 산맥에는 5천m가 넘는 고봉이 일곱 개가 있다. 그중 조지아에 4개의 고봉이 있다. 카즈베크 산은 Shkhara(5,193m), Janga(5,051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빙하로 덮인 성층 화산인 카즈베크 산이 하늘을 곧게 치켜들고 있는 듯한 고고한 모습에 사람들은 압도당한다. 마치 모든 것이 다 파괴되고 오직 기둥 하나만 남아 혼자서 하늘을 받치고 있는 신전의 모습이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펼쳐진 날이면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보다 앞서 카즈베크 산이 청아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 같다. 카즈베크 산은 1868년 영국 산악인 더글라스 프레시필드가 최초로 등정하였다. 그도 산에 오르면서 신의 소리를 들었을까.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 판도라가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을까. 몇 천 년의 세월이 흘러 숱한 사연을 뒤로한 채 눈물로 기도하는 수도사의 기도 소리를 들었을까. 나도 산을 오르면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나.


한희원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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