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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원의 트빌리시편지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 <34> 시간이 멈춘 마을 텔라비

입력 2020.07.02. 16:35 수정 2020.07.02. 18:09
흐르는 세월 속에 멈춰진 나의 시간
코디언 켜는 남자

빈틈

비가 오려는가

좀처럼 보이지 않던

까치 울음소리가 크다

봄의 빈틈을 파고드는

횟빛 비수가 새의 가슴을 찌르는가 보다

깊숙한 대지의 움직임을

하찮은 미생물이 먼저 안다

욕망은 노래를 잃고 시를 잃게 한다

대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외면하고 그의 예시를 알지 못한다

빗방울이 언뜻 떨어지지만

새들은 나무 사이를 오간다

햇빛이 없어도 푸른빛이 난사된다

체리꽃이 언제나 다시 피려나

가슴에 심은 체리꽃

찔레꽃 닮은

그 무성한 하얀 꽃잎

비가 오는데도 눈부시다

(한희원)


조지아의 들녘은 한 편의 잘 짜여 진 교향곡 같다. 어떤 때는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가 또 어느 날은 걷잡을 수 없는 울림으로 찾아온다. 봄이 오면 조지아의 들녘은 눈부신 하얀 체리 꽃으로 몸살을 한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체리 꽃은 가을날의 사시나무처럼 떨며 연둣빛 나무와 풀잎 사이를 떠돈다.

조지아는 국토가 작은 나라이지만 산악지역이 많아 광활한 들녘이 곳곳에서 몸을 드러낸다. 도시를 빠져나오면 끝이 없을 것 같은 들녘과 만나게 된다. 긴 몸매를 드러내고 누워있는 언덕. 그 너머에는 구름이 방황하는 영혼들을 끌어모아 행렬을 이루어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을 연출한다. 내 영혼도 구름 한편에 머물며 걷고 있음을 느낀다.

언덕 아래에는 어김없이 강이 흐른다. 강가의 큰 나무 아래에 앉아 흐르는 물살을 바라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구름도, 언덕도, 바람도, 세월도 덧없이 흐른다. 그러다가 흐르던 모든 것이 멈추면 내 시간 앞에서 나와 마주하고 있을 나를 생각한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멈춰진 나의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

아트빌리시 약사

대학시절에 검붉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폭우가 내리기 전,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날을 좋아했다. 그런 날에는 마음의 동요를 이겨내지 못하고 화구를 챙겨 집 근처로 나갔다. 근처 억센 풀이 돋아난 황량한 들녘에 앉아 바람에 휘몰아치는 황토 언덕과 나무를 그렸다. 정신없이 그리다 보면 어김없이 폭우가 내렸다. 세찬 비를 맞으며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온몸은 물에 빠진 생쥐마냥 흠뻑 젖은 채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예전의 그런 감성이 그립다. 그런 날이 더 그립다.

트빌리시에서는 갑자기 돌풍이 부는 날이 많다.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고요한 침묵의 날인데 순식간에 강한 돌풍이 몰아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돌풍은 낡은 간판이며 견고하지 못한 구조물들을 거리로 내동댕이친다. 이곳은 높은 산악지형과 바람막이조차 없는 들녘이 이어져 있어 거센 바람이 횡행하는 것 같다.

그래도 여행자들은 바람이 부는 날 바람과 함께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트빌리시에서 한 시간 남짓 갈 수 있는 곳 중에서 들녘이 아닌 높은 산을 넘어야 갈 수 있는 곳이 텔라비이다. 텔라비는 시그나기와 함께 와인 주 생산지인 카헤티 지방의 가장 중요한 마을이다. 보통 일반 관광객들은 가지 않는 곳이지만 조지아 마을 중에서 꽤 인상적인 곳이다. 트빌리시에서 텔라비로 가려면 울창한 나무숲을 한참동안 헤치고 가야 하는 산길이다.

저녁별과 나무

점점 고도가 높아지고 무성한 숲을 지나면 갑자기 확 트인 지평선이 보인다. 이 지평선이 보이는 곳이 정상이다. 산 정상을 넘어가면 산 중턱에 큰 나무가 서 있다. 나무 아래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커피숍이 있어 외로웠던 여정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관광객이 몰리지 않는 곳으로 사람은 드물지만 나그네 몇 명이 나무 의자에 앉아 겹겹이 누워있는 산 능선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 이국의 땅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 이런 곳에서 마시는 커피는 단순한 커피가 아니다. 모든 그리움을 가슴으로 마시는 것이다. 나도 나무 아래에 앉아 그리운 땅, 그리운 사람들을 섞은 커피를 마셨다.

이 산을 지나면 알 수 없는 마을 텔라비가 나온다. 그곳 사람들의 눈빛은 어떠할까? 마을은, 집은, 나무는, 그곳의 바람은……. 뜨거운 커피의 여운을 안고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바람이 미는 대로 텔라비로 향해 간다.


한희원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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