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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원의 트빌리시편지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 <41> 주타 트래킹(상)

입력 2020.08.20. 18:31 수정 2020.08.20. 19:24
'사메바 성당 앞 과일가게'

종착역을 향해 홀로 터벅터벅 걷는 고독을 따라


그대가 있는 곳에도 비가 내리려나

회색의 도시에 비가 내린다

늙은 나무는 비에 젖어 짙은 흑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밤을 떠나지 못한 그림자들이 도열하듯 서 있다

서로를 떠나지 못한 그리움들이 서성인다

미련은 화석처럼 굳어 좀처럼 녹지 않는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지 않을 때까지

건물들은 우아한 옷을 벗고 나신으로 비에 젖어 있다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고 길을 걷는다

검은 새들이 하강하여 부딪히며

허공을 지나가는 영혼을 차갑게 가로지른다

순간, 이 느슨한 숨막힘의 영상을 깨우는 빛이 보인다

푸른 잎, 비에 젖어가며 더 발하는 푸른 잎

검은 횟빛의 도시에 들려주는 소녀들의 노래

두 사선의 교차점에서 시간은 정지되고 다시 흐른다

비가 양철지붕을 계속 때린다

아프지 말라 두드리는

어머니의 기도 소리 같다

묵언, 하루 종일 비와 침묵으로 대화한다

(한희원 시 '비와 침묵')


티베트 사람들이 바람을 따라 걷는 이유는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걷는다. 홀로 묵묵히 걸을 때도 있고, 때로는 무리를 지어 행군하듯 걷기도 한다. 그 중 사랑하는 사람과 한 방향을 향해 손을 잡고 걸을 때가 가장 행복한 걷기이다.

앞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흐릿한 길 위에 서면 마음의 안녕이 흔들리고 조급해지며 의식마저 혼미해진다. 그동안 걸어왔던 발자국을 세어보고 앞으로 더 가야 할 길을 가늠하며 이리저리 방황한다. 일행과 떨어져 혼자 걷다가 다시 무리를 만나 걷기를 반복하며 까마득히 높은 고지를 힘겹게 넘어야 할 때도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생의 길은 궁극적으로는 생의 종착역을 향해 홀로 터벅터벅 가는 것임에 틀림없다.

트빌리시에 와서는 거의 매일 시내로 나가 거리를 쏘다녔다. 그림을 그리다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오후가 되면 붓을 놓고 숙소를 벗어나 생소한 골목길을 걷는다. 원래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골목길을 좋아하기도 하고, 하루 종일 숙소에만 있으니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어서이다.

'아코디언 메고 가는 사람'

구불구불한 골목 안에는 따뜻한 웃음꽃과 함께 가슴 아픈 사연이 스며들어 있어 더 마음이 끌린다. 처음에는 방향감각을 잃어 숙소로 되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해 깊은 밤까지 헤매었다. 낯선 골목길을 겁도 없이 불쑥 들어갔다가 전혀 엉뚱한 동네를 만나기도 했지만 어딜 가서든 나의 골목길 투어는 계속될 것 같다.

내가 사는 마자하시빌리는 트빌리시 신시가지와 관광객이 많이 찾는 올드타운의 중간 지점에 있다. 같은 방향에 위치한 루스타벨리와 올드타운은 지하철로 두세 정거장만 가면 된다. 하지만 신시가지는 지하철을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트빌리시에서 화구를 사러 갈 때는 지하철을 이용하지만 돌아오는 길은 걸어서 시내로 다녔다. 올드타운은 바닥이 울퉁불퉁한 돌로 되어 있어 많이 걸으면 무릎이 아팠다. 게다가 두세 달 만에 신발이 해지는 불편함도 겪었다.

거리에서 버스킹 하는 늙은 연주자의 음악에 취해 한참 동안 연주자를 바라보며 넋을 읽기도 했다.

'별을 찾는 사람들'

한적한 레스토랑에 앉아 맥주 한 병, 와인 한 잔을 앞에 두고 시를 쓰고 상념에 잠겨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이방인은 외로움에 몸서리치며 홀로 걷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트빌리시 시내가 아닌 카즈베기 산이 있는 스테판츠민다 마을 근교의 주타로 트레킹을 가는 날이다. 조지아에서는 10월 중순경쯤이면 눈이 많이 와 산악길이 통제되는 곳이 많다. 특히 북쪽에 위치한 우쉬굴리는 더 그렇다. 지금이 11월 초인데 다행히 주타 지역은 통제가 되지 않아 겨울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스테판츠민다 지역에는 주타와 트루소 두 곳의 트레킹 코스가 있는데 겨울 트레킹이라 트루소 보다는 완만한 주타로 결정했다.

11월의 겨울 산은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호텔에서 나와 마을 입구 광장에서 차를 섭외했다. 주타 마을로 가는 길은 20㎞로 스노(Sno) 마을을 지나면 포장이 거의 안 된 산악 길이다. 주타 마을은 해발 2,200m에 위치해 있어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할 정도로 위험했다. 우리를 태워다 준 차는 다섯 시간 후에 다시 오기로 하고 스테판츠민다로 돌아갔다. 마을 입구에는 호텔과 집들이 모여 있고, 산에서 출발한 물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큰 바위 위의 하얀색 십자가가 이방인을 반갑게 맞이한다.

산행은 초입부터 가파르지만 완만한 능선까지 가기 위해서는 가쁜 숨을 참으며 언덕을 넘어야 한다. 언덕에 올라서니 멀리 눈을 뒤집어쓴 차우키산(3,700m)이 보인다. 봄이면 야생화가 지천인데 지금은 눈부신 은빛의 눈 천지이다.

겨울이라 트레킹 하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온 통 하얀 눈! 눈뿐이다. 길도 하얀 눈에 덮여 눈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햇살이 고개를 내밀어 주어 따뜻했다. 앞장선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차우키산을 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찬바람이 여기는 설국이라며 등을 거칠게 민다.

한희원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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