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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원의 트빌리시편지

한희원의 트빌리시편지 <42> 주타트래킹(하)

입력 2020.08.27. 16:41 수정 2020.08.28. 14:28
한희원 작 '코카서스'
설국에서 만나는 앞사람의 발자국

침묵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며 새벽을 맞이한다

늙은 호로비치의 연주는

느리고 격렬하게

영혼을 내게로 인도한다

고흐의 붓도 이러했을까

새벽은 거대한 침묵으로

다가오다 멈추고

다시 다가온다


몇 천 년을 대지에 뿌리박은

나무처럼 견고해서

움직일 수 없다

고흐의 별이 순례를 멈추고

호로비치의 연주가 끝났다

뜬 눈의 아침이

머리맡에 앉아

빗소리처럼 토옥 톡

생을 깨운다 (한희원)


산언덕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 누군가 걸었을 산길도 흰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봄날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붉은 야생화도 가을에 나뒹굴던 추추한 낙엽들도 지상에서 잠시 사라졌다. 화가들도 자신이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흰색으로 덧칠을 하며 생각에 잠긴다. 자연도 겨울이 오면 성장을 멈추고 침묵에 잠긴다. 나무는 가을에 가장 화려하게 자신을 치장한다. 늦가을로 접어들면 그 화려함을 모두 버린다.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기약하기 위함이다.

쉼은 활력을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쉬지 않고 질주해 왔다. 빠르게 달리면서 종착역을 바로 눈앞에 두고 브레이크를 작동하지 않고 직진하며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 무언가 새로움을 만나기 위해서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사색의 동굴로 들어가야 한다. 사색은 세상을 깊게 조망하는 과정이며 기다림의 시간이다.

한희원 작 '쿠라강의 붉은 바람'

산길 사이로 보이는 차우키 산(3700m)은 홀로 서 있다는 느낌이 드는 산이다. 바위 몇 개가 한데 어우러져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봉우리가 자신에게 찾아온 운명에 저항하듯 어깨동무를 하고 서 있다. 흰 눈이 쌓인 길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저만큼 산언덕에 나무로 지은 집이 보인다. 주타 바(JUTA BAR)이다. 주타 바는 여름에만 문을 열어 여행객을 맞는다. 주타 바 옆에 있는 작은 호수도 동면에 들었다. 여름이면 푸른 물로 가득 채워졌을 호수가 눈발을 견디고 있다.


호수 옆에 앉아 호텔에서 준비해준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려고 배낭을 열었다. 아뿔싸! 배낭이 텅 비어 있다. 산을 오르면서 길을 찾느라 개울을 건너고, 이리저리 바위를 피하면서 배낭지퍼가 열렸나 보다. 도시락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걸었더니 이 사단이 났다. 요깃거리가 없으면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초행인 겨울 산을 타기가 힘들다. 넋을 놓고 앉아있을 수가 없어 오던 길을 되돌아가 도시락을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할 수 없이 식사를 포기하고 다시 산행에 나섰다. 돌이킬 수 없다면 미련일랑 가급적 빨리 잊는 게 상책이다.

한희원 작 '오랜 기억 속의 강'

겨울 산행에 인적마저 끊기니 적막하기 그지없다. 세상은 온통 흰 빛인데 바람도 없이 정적만이 설국을 지배한다. 우리보다 앞서간 사람이 있는지 눈 위에 발자국이 나있다. 작은 언덕을 오르니 빙하에서 흘러나오는 개울이 보인다. 물이 티끌 하나 없이 맑고 차다. 서늘한 냉기가 전신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개울을 덮고 있는 흰 눈 사이로 푸른 풀잎이 눈에 들어온다. 봄여름에 지천으로 피었던 야생화의 흔적이 아른거린다.

주타 트레킹은 보통 1박 2일이나 혹은 2박 3일 일정으로 다녀온다.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거나 비박을 한다. 6월이 되면 차우키 산 정상을 넘어가는 코스가 열린다. 여름에 새벽 일찍 출발하면 차우키 산을 넘어 산 반대편 롯지에서 잘 수 있다. 이런 산행은 경험이 많은 가이드와의 동행이 필수이다. 11월의 겨울 산행에 준비가 철저히 되지 않은 관광객은 사고를 당할 위험이 있다. 차우키 산을 넘지 않을 경우라면 산 아래 3300m 정도까지는 오를 수 있다.

멀리 차우키 산을 홀로 남겨두고 아쉬움을 간직한 채 하산을 서두른다. 내려오는 길에 젊은 한국인 여행객 몇 사람을 만났다. 이런 먼 곳에서 더군다나 인적이 드문 겨울 산행 길에 한국인을 만나다니 믿기지 않았다. 스쳐지나가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고향을 다녀온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졌다.

가파른 언덕을 내려오니 마을이 보인다. 문을 닫은 레스토랑은 겨울이라 더 황막해 보였다. 우리 일행이 예약했던 사륜구동 차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트빌리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다시 스테판츠민다로 가야 한다. 스노 마을의 조지아 정교회 지붕이 햇살에 느긋이 반짝인다.

조지아에는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가 많다. 메스티아 쪽의 찰라디 빙하, 코룰디 호수, 보르조미 국립공원 트레킹, 다비드가레자 트레킹, 조지아 동북쪽 국경지역을 짚을 타고 7시간 정도 3,000m의 험준한 산악길을 넘어가면 만나는 투세티 국립공원의 오말로-달트로-기레비 마을 트레킹 등. 조지아는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른 후 걸으면 그곳이 바로 트레킹 코스다. 찬연하게 아름다운 길이 그 자리에 있다.

한희원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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