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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원의 트빌리시편지

조지아 문학사의 거봉이자 신화

입력 2020.11.26. 20:42 수정 2020.11.27. 09:17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
<53>조지아의 국민 시인 쇼타 루스타벨리 上
'자바하시빌리의 밤'

물감이 헤일 수 없이 겹쳐져

고목의 등걸마냥 두터워진

화실바닥

뒹구는 물감 통 틈바구니에

노오란 은행잎이 누워있다

길을 걷다가

내 신발 바닥에 묻혀

이곳까지 왔나보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슴이 저려온다

내 모습일까

네 모습일까

나는 가만히 나뭇잎을 주워

허공에 날려 보냈다

이별은 만남이고

만남은 또한 이별이다

자유는 구속이고

구속은 또한 자유임을

나뭇잎 바람 따라

어디론가 가겠지

이별은 이별이 아니고

자유는 자유가 아님을

나뭇잎은 이미 알고 있었나

나뭇잎이 떠난 자리

붉은 물감 자욱 선명하다

'노오란 은행잎과 자유 그리고 이별' -한희원


가을비가 내리는 하루, 눈부신 햇살을 잠깐 보여주더니 다시 을씨년스러운 횟빛이 가득하다. 거리에 검은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나목이 거리를 지키고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 순간을 시인은 어떻게 노래할까.

시인! 누구나 한번쯤은 시인을 꿈꾼다. 시인은 평이한 단어들을 엮어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위로하는 경이로운 능력자이다. 시인은 우리를 꿈꾸게 하고 때로는 좌절케도 한다. 문학소년, 소녀를 꿈꾸며 생의 시간을 지나 각박한 현실에서 동분서주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시인이라는 꿈은 저 멀리 사라지고 세상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다가 시를 읽으면 가슴이 저리면서 그동안 감춰졌던 감정들이 일제히 솟구치는 경험을 하며 감탄하기도 한다. 별 하나, 바람 한줌으로 시인은 그리움을 얘기하고 이별을 열창하며 눈물을 쏟는다. 생을 성찰하다가 짧은 언어 속에 담긴 역사와 철학을 통찰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시인의 가슴을 열어보면 창작의 고통으로 타다가 남은 검은 재밖에 없을 것이라 탄식한다.

어느 나라든 시인 중에 뛰어난 국민 시인이 있기 마련이다. 민족의 염원이나 꿈과 한을 시어로 채워 국민들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고 위로하는 시인이 존재한다. 조지아에서는 쇼타 루스타벨리를 그렇게 부른다. 조지아 국민 시인!

'시그나기 가는 길'

(쇼타 루스타벨리의 장편 서사시 '호랑이 가죽을 두른 용사')

서문

1 경이로운 능력으로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여

당신은 모든 창조물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고

우리 인간들에게 다양한 형상과 수많은 빛깔이 넘치는

아름다운 이 땅을 주시고

자신과 닮은 얼굴을 지상의 왕들에게 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에 만족해야 한다.

일꾼은 열심히 일해야 하고 용사는 용감히 싸워야 하는 법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의 열기에 타버려야 한다.

사랑에 빠진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도 다른 사람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18 시인은 자신의 재능을 쓸데없이 낭비해서는 안 된다.

시인은 한 여인만을 사랑해야 하고, 그 여인만을 숭배해야 한다.

모든 재능을 바쳐 그녀를 찬양해야 하고,

오직 그녀를 위해 마음을 태워야 한다.

어떠한 상도 바라지 말고 혀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창조해야 한다.


22 아랍인들을 '사랑에 빠진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 부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되면 정신이 나가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신 가까이 가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거기까지 가는 동안 지쳐 쓰러진다.

다른 이들은 지상의 아름다운 손길에 넘어가 다시 사랑에 빠진다.


1280 오, 나의 님이여 내가 겪은 모든 일을 이 편지에 적어 보냅니다.

나의 몸을 펜으로 쓸개즙과 같은 쓰라린 고통을 잉크 삼고 당신에게 영원히 결합된 내 가슴을 편지지로 씁니다.

슬픔에 빠진 가슴이여, 너는 그분의 가슴과 영원히 쇠사슬로 묶었다.


1584 태양과 같이 빛나고 조지아인들의 보호자인

나는 위대한 왕 다비드의 이야기를 시로 엮었다.

회오리바람처럼 동에서 서까지 모든 나라를 굴복하게 만들고

배신자는 재처럼 만들어 버리고 충성스런 자는 칭찬하시는

그녀를 위해 이 글을 썼다. 


1585 내가 어떻게 다비드왕의 위업을 제대로 찬양할 수 있겠는가

먼 나라들의 왕들의 놀랍고 신비스러운 이야기와

그들의 업적과 용맹이 끝없이 찬사를 받는 곳의 이야기를

시로 만들었고, 이제 그 이야기를 마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게 이 세상이고 운명의 변덕은 끝이 없다.

인생은 눈 깜짝할 새보다 빠르게 지나간다.

당신은 행복을 찾아 무엇을 하려는가? 운명은 변덕스러운 것이다.

운명에 배신당하지 않는다면 자신과 하늘 두 세계에서 행복해질 것이다.

(쇼타 루스타벨리 '호랑이 가죽을 두른 용사' 허승철 역)


쇼타 루스타벨리(1160~1220년 경)는 조지아 문학사의 거봉이자 신화이며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국민 시인이다. 그의 12세기 장편 서사시 '호랑이 가죽을 두른 용사'는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국제공항의 이름도 쇼타 루스타벨리 국제공항이다. 트빌리시에 국립박물관, 국립미술관, 현대미술관, 국회의사당, 오페라하우스 등이 밀집해 있고 가장 아름다우며 유서가 깊은 거리 이름도 루스타벨리이다. 내가 가장 많이 들렀던 화방이 있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쇼타 루스타벨리, 그의 신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본다.

한희원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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