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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원의 트빌리시편지

조지아 거리서 화집으로 만난 국민 화가

입력 2020.12.10. 20:40 수정 2020.12.11. 10:36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55>
조지아의 여류 화가 엘렌 아크블레디아니 上
'트빌리시 풍경'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기척도 없이 비가 내린다

아스팔트가 흑색으로 짙어가는 모습을 보며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운명이 이렇게 다가오는 것일까

멈춰버린 시간위에

기차가 굉음을 내고 지나간다

나무들이

나목으로 서 있다

운명을 대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들은 운명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암갈색의 나무들이

옷을 벗은 채 비에 젖어

검은 색으로 변해간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검은 외투로 갈아입고

거리를 걷는다

횟빛 하늘이 땅으로 천천히 내려온다

땅이 하늘로 오른다, 그들이

가장 낮은 첼로의 음으로 노래한다

사랑에 미쳐가는 늦가을

한 번도 가지 못한 타슈켄트의 혹독한 겨울이 다가온다

쿠라강변의 늙은 나무는

떠나지 않고 있을까

곧 겨울이 올 것 같다

한희원의 시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트빌리시 자바하시빌리에 있는 숙소에서 빠져나와 길을 걸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화구를 사러 무작정 나서는 길이다. 자바하시빌리는 트빌리시의 변두리 지역으로 2층 높이의 주택 건물이 길 옆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잿빛으로 칠해진 건물은 오랫동안 손보지 않아 낡고 퇴락한 모습이다.

집집마다 철대문이 있는데 대문의 부조물 모형이 각기 다르다. 수많은 바람과 햇살에 녹이 슬었지만 무척 아름다웠다. 거리로 향한 창문 안에는 고양이가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고 있거나, 꽃이나 인형들이 놓여있었다.

어쩌다 열려 있는 대문 안을 살짝 들여다보면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은 안쪽으로 깊숙이 더 들어가 있었다. 거리와 맞닿아 있는 건물 사이를 통과해 정원으로 가는 구조이다. 그러다 보니 열려 있는 대문 사이로 보이는 통로는 동굴처럼 어두웠다.

길옆으로 백 년은 족히 넘을 듯한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길을 걷다 보면 조지아 춤을 가르치는 학교가 보이고 인도인들만 이용하는 호텔도 지나게 된다. 녹색 지붕의 러시아 정교회 앞에는 동전을 구걸하는 여인들과 어디서 꺾어왔는지 모르겠지만 꽃을 파는 할머니들이 앉아 있다. 플라타너스 길을 따라 걸으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게들이 나온다. 요즘 조지아는 가게를 새롭게 단장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지하철역 입구에서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카드를 판매한다. 지하철은 러시아시대 때 방공호로 사용하려고 했는지 100m 넘게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가끔 덜컹거리는 에스컬레이터에 앉은 채 가는 사람도 종종 보인다.

'트빌리시 중앙 시장을 걷다'

조지아 사람들은 동양인들에게 무심한 편이다. 지하철에서 흑인이나 동양인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다른 국가와 교류가 없다는 것으로 짐작된다. 미술관과 오페라하우스 등이 밀집한 루스타벨리에 화방이 있을 것 같아 루스타벨리 역에서 내렸다.

번화가답게 루스타벨리 입구에는 젊은이들로 붐볐다. 지하철 입구 계단 위의 작은 광장에 동상이 하나 서 있었다. 조지아의 민족시인 '쇼타 루스타벨리'의 동상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화방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 때 길 옆 계단에서 고서를 팔고 있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트빌리시는 거리 곳곳에서 낡고 오래된 책들을 가지고 나와 팔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책을 펼쳐 읽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이곳 사람들은 책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다.

진열되어 있는 책 중에서 화집이 보인다. 대부분 내가 알고 있는 화가들이다. 모네나 빈센트 반 고흐의 화집도 보이고 피카소도 들어온다.

서적을 뒤적거리다 생소한 화집을 발견했다. 처음 보는 그림으로 조지아의 풍경과 인물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국땅에서 우연히 처음 본 그림을 만났다.

그림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화집으로 편찬해 거리에서 판매하고 있는 걸 보니 조지아의 대표적인 화가인 것 같았다. 화집을 펼쳐보니 러시아어와 조지아어로 쓰여 있었다. 맨 앞장에 한 여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 선명하게 찍혀 있다. 그늘이 짙고 우수에 찬 모습이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화집을 사서 옆에 끼고 화방을 찾아 나섰다.

한희원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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