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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원의 트빌리시편지

자연 그대로인 강변에 핀 체리꽃은 봄이 되고 시가 된다

입력 2021.02.04. 18:17 수정 2021.02.04. 18:26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
<61>조지아를 찾은 러시아 작가 푸시킨, 톨스토이, 고리키(4)
'트빌리시 블루 재즈바'

인생

사는 게 무어라고

되돌아보면

낙엽이 몇 번인가 떨어지고

거칠게 내리다가

금방 사라지는

한갓 눈 발 같은 시간이거늘

죽을 듯 사랑하고

죽을 듯 미워하고

가지고 갈 무엇도 없는데

무얼 그리 차곡차곡 쌓아 놓은지

비겁한 비수를 품고

무지개 단칼에 사라지는 언덕에

늙은 고목이 되어 서본다

언 땅 헤치고

흙 한 움큼 쥐어

허공에 뿌린다

달빛에 기대어 풀잎을 쓰다듬는

저녁

언덕에 앉아

그대가 떠나간

먼 길을 바라본다

그림자만

내 곁에 앉아있다

(한희원의 시 ?인생- 전문)


봄! 얼마나 가슴 뛰는 단어인가. 가을은 왠지 스산하고 마음의 깊어짐을 느끼지만 봄은 오랜 기다림 끝에 성사된 만남처럼 설레 인다.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전령사는 꽃이다.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2월초인데 벌써 꽃망울이 맺혔다. 성미 급한 꽃은 잠깐 머무는 햇살에도 몸을 드러낸다. 얼어붙은 눈 더미 사이에 핀 노란 복수초는 하얀 눈보다 더 차갑고 눈부시다.

잔설 속에 핀 섬진강의 매화는 또 어떠한가. 눈바람에 매화꽃이 떨어져 난무하면 그 잔혹한 아름다움에 나도 너도 다 같이 군무속의 꽃이 된다. 조지아에서는 매화보다 늦게 개화하는 체리꽃이 봄을 알리는 전령사이다. 트빌리시 거리에서 하얀 체리꽃잎이 안개 빛으로 피어나며 사람들을 맞이한다. 터키에서 흘러나와 조지아를 거쳐 카스피해로 가는 쿠라강변(조지아에서는 므트크바리)의 체리꽃이 섬진강변의 매화인양 정겹다.

조지아에서 맨 처음 쿠라강변을 마주하고 그 고운 모습에 넋을 잃었다. 사람의 손길이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강, 나무와 나무 사이를 흐르는 강변에 무더기로 핀 하얀 체리꽃 무리. 아직까지는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지 않은 이곳 쿠라강을 스페인 산티아고의 순례길처럼 걸을 수 있는 길로 조성되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조지아를 찾은 러시아의 작가들도 쿠라강의 이런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을까.

카프카스의 포로 중 제10연

포로는 아무 희망도 없는 것처럼 보였고

이미 비참한 생활에 익숙해져서

포로의 설움과 뜨거운 분노를

영혼 깊숙한 곳에 숨겨버렸다

서늘한 기운 감도는 이른 새벽이면

족쇄를 찬 채 험준한 암벽 사이를 거닐며

호기심 어린 눈길로

잿빛, 붉은빛, 푸른빛아 어울러져 빛나는

아득한 산봉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정말 장엄한 광경이다!

만년설로 덮인

왕좌 같은 봉우리들은

미동도 없는 구름의 사슬처럼 보였고,

그들 사이에 우뚝 솟은 쌍봉인

거대하고 장엄한 엘브루스산은

반짝이는 얼음 왕관을 쓰고,

쪽빛 하늘에 새하얗게 빛나고 있다.

폭동을 알리는 뇌우가

천둥과 뒤섞이며 노호할 때면,

포로는 얼마나 자주 산마루에 꼼짝 앉고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고 했던가!

(중략)

(코카서스 3국 문학산책 허승철역 29-30쪽)

'트빌리시 므뜨끄바리강을 거닐며'

푸시킨은 1820년 두 달간 라예프스키 가족과 여행을 한 후, 그 해 8월에는 크림반도를 여행했다. 크림반도에서 9월까지 지내며 '바흐치사라이의 분수' 라는 시를 썼다. 이후 지금의 몰도바의 키시나우(Kishinau)에서 유형기간을 마쳤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이 기간에 쓴 푸시킨의 작품을 '남방시'라고 부른다. 1820년부터 1821년 사이에 쓴 '카프카스의 포로'를 1822년에 발간한다.

푸시킨은 러시아 터키 전쟁 때 장교들과 함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방문한다. 이때 쓴 여행 수필집이 '아르주룸으로의 여행'이다. 푸시킨은 러시아로 돌아와 아름다운 부인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염문을 뿌리던 단테스와의 결투로 인해 생을 마감한다. 푸시킨은 남방지역을 여행하며 각 지역마다 자취를 남겼다. 트빌리시, 예레반(아르메니아 수도), 바쿠(아제르바이잔 수도), 크림반도에는 시인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푸시킨을 흠모했던 시인 레르몬토프는 푸시킨의 죽음을 주제로 한 '시인의 죽음'이란 시를 쓴 죄로 전쟁 중인 카프카스에 파견된 후 생을 마감한다. 조지아는 이 위대한 시인의 초기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곳이다.

푸시킨이 떠나고 이번에는 톨스토이가 조지아의 트빌리시를 찾게 된다. 조지아를 찾은 톨스토이를 기다리고 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한희원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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