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1(화)
현재기온 6.3°c대기 좋음풍속 2.7m/s습도 31%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 나주 영모정

입력 2020.11.10. 13:56 수정 2020.11.12. 19:13
시와 술과 사랑의 영원한 자유인, 임제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두고 백골(白骨)만 무쳤난이

잔(盞)자바 권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 하노라'

1583년, 임제가 평안도도사로 부임되어 가는 길이다. 평양 못가 개성의 어느 청초 우거진 골에 무덤이 하나 있다. 시인 황진이의 것이다. 그녀의 시를 사랑했을 그가 그냥 갈 수 없다. 한 잔의 술과 한 편의 시를 남기고 간다. 이 일로 조정의 비판을 받고 부임도 전에 파직되었다는 설이 전한다. 임지로 가는 길에 기녀의 무덤에 먼저 추념한다는 것은 유교사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그녀를 시인으로 보았다. 홍안은 가고 백골만 남은 기녀가 기녀일 수는 없다. 그의 시는 '시인'의 시에 화답하는 추모의 시다. 임제가 되뇌었을 그녀의 시는 이런 것이리라.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임 오신 날 밤이면 굽이굽이 펴리라'

밤의 한 허리를 베어낸다, 초장부터 착 감기는 말이다. 춘풍은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고, 동짓달은 1년 중 가장 밤이 긴 시간이다. 하지만 둘은 동시에 있을 수 없다. 어론 임은 사랑하는 임이니, 사랑하는 임과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아인슈타인처럼 시공간을 휘어지게 하고 있다. 서리서리, 굽이굽이라는 의태어도 그렇고 상상력과 창의성이 대단한 작품이다. 황진이는 시조 6수와 한시 4수만을 남겼다. 이런 시를 쓴 그녀가 살아있다면 만사 제치고 찾아가련만, 황진이는 임제 보다 한 세대 위다. 그래서 그는 무덤 앞에서 '그를 슬허하'고 있는 것이다. 임제 시조는 '청구영언'에 전한다. 그가 부임길에 그녀의 무덤에 술을 올리는 이 삽화는 우리 문학사에 오래 기억될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싶다.

임제(林悌, 1549~1587), 나주 태생으로 호가 백호(白湖)다. 스승 없이 독학했다. 그는 어려서 뛰어난 시재를 보였다. 서당에서 비온 뒤 무지개를 보고 글을 지으라고 하니 이런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푸르고 붉은 몇 필 되는 비단을/ 직녀의 베틀에서 끊어내어/ 견우의 옷을 짓고자/ 비 온 뒤 씻어 하늘에다 걸었도다' -

22세 겨울, 상경 길에 쓴 시가 성운(成運)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그를 사사했다.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비명에 죽자 그 길로 속리산에 은거하면서 서경덕, 조식, 이지함 등 많은 후학들을 가르친 큰 선비다. 스승은 격정적이고 자유분방한 임제의 성격을 바꾸기 위해 '중용'을 1000번 읽으라 하여, 그가 지리산의 암자에서 800번이나 읽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576년(선조 9) 28세에 스승을 하직하고, 속리산을 나서면서 지은 시다.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道不遠人人遠道)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만 속세는 산을 멀리하네(山不離俗俗離山)'

이 두 줄의 간결한 칠언시는 선시(禪詩) 같은 느낌을 준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던 것이,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었다가, 다시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되돌아오는, 수행의 초중종에 있어 중장에 해당하는, 돈오(頓悟) 하였으되 이제 점수(漸修)로 나아가기 위해 하산하고 있는, 젊은 학자의 산뜻한 발걸음이 느껴진다.

그는 내려와 생원 진사에 합격했다. 이듬해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 예조정랑, 홍문관지제교 등의 벼슬을 지냈다. 당시 조정은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격화되던 때다. 호방하고 거침없는 성격의 그는 현실을 사갈시(蛇蝎視)했다. 관료들이 파당을 짓고 당리당략을 위해 서로를 질시하는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시인들이 그렇듯이 임제는 방외인으로 돌며 술을 즐겼다. 하루는 벗들과 밤새 술을 마신 뒤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시중을 들던 하인이 "대감마님, 취하셨나 봅니다. 신발이 왼쪽은 가죽신이고, 한쪽은 짚신이옵니다"라고 했다. 그의 응수가 걸작이다. "길 오른쪽에서 보는 사람은 내가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왼편에서 보는 사람은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그게 무슨 걱정이냐?"

임제가 평양도도사 직을 마칠 무렵 평양의 명기 한우(寒雨)를 만나 나눈 '한우가(寒雨歌)' 또한 널리 회자되는 유명한 시조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를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 비 온다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어이 얼어 자리 무스 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찬비에 얼어 잘까 하니, 한우에 녹아 자라 한다. 임제의 '수(酬)'에 대한 한우의 '작(酌)'이 막상막하다. 기녀의 이름을 빗댄 남녀 간의 수작이되 야하거나 속되지 않다.

영모정

임제는 늘 검(劍)과 퉁소를 지니고 다녔던 풍류남아였고 자유분방한 시인이었다. 당파싸움을 개탄하면서 벼슬을 내던진 뒤 명산을 찾아다니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1천여수의 시와 산문 소설을 남겼다. 한문소설로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이 있고 문집으로는 '임백호집' 4권이 남아있다. 16세기 조선에서 가장 개성적이며 뛰어난 문장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호방하고 명쾌한 시풍은 널리 사랑을 받았다. 글에 더하여 글씨도 잘 썼다. 특히 초서에 능하였다. 그는 고향인 나주로 돌아와 1587년(선조 20) 39세로 짧은 삶을 마쳤다.

'주변 오랑캐 나라들이 다 제왕이라 칭했는데도, 오직 우리 조선은 중국을 섬기는 나라이다. 이런 못난 나라에서 살면 무엇을 할 것이며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내 떠나거든 곡 하지 말라.'(四夷八蠻 皆呼稱帝 唯獨朝鮮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

임종에 즈음하여 그가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 '물곡사(勿哭辭)'이다. 사학자 문일평은 "임백호의 멋진 생애에서 가장 감격적인 장면은 그의 위대한 임종이다"고 경의를 표한 바 있다. 멀리 영산강이 내려다보이는 나주 다시면 언덕 위에 '영모정(永慕亭)'이 있다. 그의 조부 임붕(林鵬)이 1520년(중종 15년) 지은 정자이다. 400년이 넘은 팽나무들이 빙 둘러 단정하고 고아한 멋이 배어있다. 선연한 붉은 잎들이 늦가을 바람에 날리고 지는 풍경이 아름답다. 임제가 어릴 때 공부하고, 커서는 여러 문인들과 시를 짓고 교유하던 곳이다. 영모정에서 조금 가면 '백호 문학관'이 건립되어 있다. '16세기 조선의 가장 탁월한 문장가'라고 쓴 촌평이 현관에 걸려 있고 마당에 그의 유언을 새긴 '물곡사비'가 세워져 있다. 임제의 '석림정사' 친필 현판, 제주도 여행기 '남명소승', 친필 미공개 시편 등도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한편에 시인의 생을 압축해 놓은 듯한 그의 시(「이 사람(有人)」 한 줄이 걸려 있다.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srb.co.kr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