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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2부- 광주 서창동 절골마을

입력 2021.03.28. 18:02 수정 2021.04.01. 15:29
‘사(士)란 무엇인가’, 16세기 사림의 정체성을 일깨운 박상

'신하의 도는 의(義)를 따르는 것이지 임금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충언은 역시 귀에 거슬린다. 절대왕정시대 이 방자(放恣)한 언설은 조선개국 딱 100년 만에 나왔다. 1493년(성종24) 홍문관원 유호인이 어느 인사의 사직을 만류하라는 왕명을 거부하는 와중에 동료 성세명이 이를 두둔하면서 한 말이다. 이 말은 '왕이 인의(仁義)를 잃었을 때는 필부에 불과한 것이라 '역위(易位)' 할 수 있다'는 맹자의 왕도정치에 뿌리를 둔 것이되, 자유로운 사상가의 논설이 아닌 절대권력 앞에서 신하가 대놓고 내뱉기에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은 '군(君)은 무엇이고, 사(士)란 무엇인가?'라는 무엄한 질문에 대한 서릿발 같은 응답이기도 하다. 15세기가 조선 창업기의 과제를 헤쳐 나가는 군주의 시대라면, 16세기는 '사(士)'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양립의 시대였다. 시대의 화두를 던져놓고 15세기는 그렇게 저물었다.

광주를 '의향(義鄕)'이라 할 때 대개 그 뿌리를 박상에게서 찾는다.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은 선대가 충청도에 살다가 계유정난 이후 외가인 광주 서창동 송악산 기슭의 절골마을에 낙향, 터를 잡았다. 1496년 진사가 되고 1501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병조좌랑, 전라도사, 사간원헌납, 담양부사, 나주목사 등 29년의 관직생활을 거친 뒤 1530년 고향에 돌아와 삶을 마쳤다. 향년 56세. 그의 생애는 15~16세기에 걸쳐 있지만, 입신은 16세기 벽두였다. 그가 남긴 시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비바람 비록 어두운 것 같지만/ 닭 우는 소리는 새벽을 넘기지 않는다…'문우 고언룡에 대한 답시인 이 시는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로 시작되는 이육사의 '광야',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유신독재시대의 경구를 떠오르게 한다. 계명(鷄鳴)이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며 새벽을 기다리게 하는 희망의 은유로서 그는 원조가 아닐까 싶다.

그의 절의정신은 '신비복위소(愼妃復位疏)'에서 잘 나타난다. 이 소는 1515년(중종10)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이 순창 강천사 입구에 모여 지어올린 상소문이다. 세 사람이 관인을 소나무에 걸고, 즉 직을 걸고 소를 올렸다 하여 이곳을 삼인대(三印臺)라 부른다. 신비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다. 13세에 진성대군과 혼인했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자연스럽게 왕비가 되었다. 중종의 정비(正妃), 훗날 단경왕후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연산군 폐위의 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해되고 왕비는 7일 만에 폐위된다. 그로부터 9년이 흐른 1514년. 그해 새 왕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은 직후 산후병으로 죽고, 여름에 우박이 내리는가 하면, 발 다섯 달린 송아지가 태어나는 등 세상이 뒤숭숭했다. 중종은 두루 세간의 비판을 듣는 '구언(求言)'의 전지를 내렸다.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 '봉황정

'시경에 이르기를 배필을 맞이하는 것은 인륜의 시작이고…왕도의 큰 발단입니다.…전 왕비 신씨가 폐위된 지 거의 10년이 됩니다.…무슨 큰 까닭과 명분으로 이런 정상이 아닌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전하께서 폐위하신 것은 과연 무슨 명분입니까?' 신비복위소는 시경과 역경을 예시하며 폐위의 부당함을 지적한다. 이어 '반정 초기에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이 이미 신수근을 제거하고는 왕비가 그의 딸이므로 후환을 염려하여 자신들을 보전하려는 사사로운 생각을 가지고 폐위시켜 내쫒자는 음모를 꾸몄으니…'이는 까닭도 명분도 없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이어진다.

16세기 벽두는 임금이 신하를 살육하는 희대의 광란(무오사화 1498, 갑자사화 1504) 속에 시작되어 임금을 갈아 치우는 '역위(중종반정 1506)'가 일어나는 때다. 신비복위소는 반정세력이 집권하고 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나온다. 이 소의 말미에 '음모'라는 표현이 있다. 앞부분이 폐비의 억울함을 논하는 '예(禮)'에 관한 것이라면 뒷부분은 시비를 가리는 '의(義)'의 성격으로 바뀐다. 음모는 치죄(治罪)가 불가피한 일이고 국모폐출은 참형 감이다. 더구나 당사자가 누구이며 이 글이 겨누고 있는 칼끝 어디인가를 살펴보면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정면도전'이 아닐 수 없다.

이 소는 두 가지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하나는 지금 집권세력은 정의로운가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무력이 아닌 논변으로 시비를 가려야 하되 그 언로는 자유로운가의 문제이다. 무승부가 없는 건곤일척의 싸움이다. 반정공신·훈척세력들이 격노하였으며 조정에 파란이 인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여기서 야권이라 할 사림이 자각하기 시작한다. 자각은 결집을 가져왔고 결집은 세력을 형성했다. 이 소는 16세기 조광조를 중심으로 조선의 사림이 대안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면서 훈척세력과 권력투쟁의 서막을 열게 된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피 흘리지 않은 민주주의가 없듯이, 중종이 훈구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박상은 남평으로, 김정은 보은으로 유배를 가게 되고, 이 소는 훗날 사림이 참화(기묘사화)를 당하는 불씨가 된다.

박상의 절의정신을 보여주는 삽화 하나. 1505년 전라도사 당시 나주 사는 천민 우부리의 딸이 애첩으로 간택되어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다. 우부리는 권세를 믿고 부녀자 겁탈 등 온갖 패악을 저질렀지만 수령들도 그를 어쩌지 못했다. 박상이 부임 직후 그 죄를 물어 단번에 장살(杖殺)시켜버렸다. '왕의 장인'을 극형으로 다스린 것이다. 연산군이 대노하여 사약을 내렸으나 열흘 뒤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화를 면했다는 얘기다.

또 하나는 '동국사략'의 편찬이다. 1522년 충주목사 재직 당시 '동국통감'을 축약 서술한 책이다. 신비복위 상소 이후 기묘사화가 이어지며 참람하던 시절, 현실에 대한 좌절과 비판의식이 역사서를 쓰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책에서 고려 말 새 왕조 개창에 반대했던 비 혁명파 유신들의 입장을 적극 옹호하고 있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여 유랑의 삶을 살았던 당대의 천재 김시습의 '매월당문집'을 간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집집마다 송사로 울부짖음 가득하고/ 오랜 세월 근심으로 귀밑머리 하얗다/ 닭 잡는 아전들은 길 위에서 호통치고/ 송아지 잡아가니 처자식은 거위처럼 운다/ 어부를 매질하여 전복을 까게 하고…

무오년 연산의 미친 비바람 불어/ 사림은 서로 울며 벽지로 쫓기었다/ 관서로 귀양 간 집에선 사람이 먼저 죽으니/ 영외의 우거에 실려 온 시신에 눈물이 쏟아진다…

시, 앞에 것은 '하하(荷荷)'로 원망과 탄식의 소리다. 끌려가는 송아지를 바라보며 거위처럼 우는 처자식, 이 빛나는 시어에서 가렴주구의 현실이 거울처럼 비쳐지고 있다. 뒤에 것은 '직제학 표빙(表憑)의 모친에 대한 만시(挽詩)'이다. 표빙은 무오사화 때 귀양 가다 장독이 도져 객사한 남계 표연말의 아들이다. 표씨 어머니라는 사화의 상징을 통해 시대와 훈척세력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절의의 선비이자 도학자, 강직한 관료로 알려져 있지만 1천160여 수의 방대한 시를 남긴 당대의 문호이기도 했다. 송순의 스승인 박상은 훗날 호남 가사문학이 꽃피는 기름진 토양으로 작용한다.

신비복위소는 '사특한 의견'으로 평가절하 되었다가 '만세의 정론'으로 격상되고, 2세기 이후 영조 대에 '늠름한 행위'로 찬사를 받기에 이른다. 신비는 1739년 단경왕후로 복위되었다. 절골마을에 박상의 사당이 있고, 광산구 소촌동에 조카 사암 박순의 위패를 함께 모신 '송호영당'이 있다. 남구 압촌동~벽진동의 도로 이름이 '눌재로'이고, 광산구 도천동~신촌동의 도로 이름이 '사암로'이다. 영랑과 시문학파를 주도했던 용아 박용철이 후손이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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