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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

마한인의 견고한 토착성, 고유문화·정체성 지켜냈다

입력 2020.10.26. 09:33 수정 2021.02.16. 11:11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Ⅱ<8>지석묘와 전라도 정신(下)
보성 석평유적

고흥군 과역리 민등 고분군에는 길이 540㎝, 폭 250㎝, 높이 130㎝의 단 1기, 길이 3m 정도 되는 것이 군(群) 별로 2~3기, 대부분은 길이 1m 안팎 정도의 소형 지석묘 등이 있다. 작은 지석묘들이 중앙의 큰 지석묘를 감싸고 있는 모양이다. 규모가 큰 지석묘 조영 집단이 세력이 가장 컸고, 3m 크기 지석묘 군은 다음 단계의 정치 세력, 아주 많이 분포된 길이 1m 이하의 작은 지석묘는 일반 백성의 묘제로 생각된다. 이처럼 규모의 차이를 통해 집단 내의 위계화를 생각해볼 수 있다. 피장자 신분이 다른 계층이 한 곳에 있는 현상은, 마한 지역 군장들이 읍락에서 백성과 잡거(雜居)를 했다는 삼국지 위서 기록과 상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철기 시대 후기까지도 주된 묘제로 지석묘가 기능하고 있었던 것은 일반 백성들의 묘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지석묘 군이 조영되는 말기 단계에 이르러서는 부장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묘제로 기능한 전남의 지석묘는 토착성을 강하게 띠어 새로운 묘제가 들어와도 그것이 수용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전남 지역 동부에 새로운 묘제가 늦게 들어온 까닭이다.

전남 지역 지석묘를 통해 소규모 정치 세력들이 독자성을 가지고 있어 통합력이 미흡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좁은 산악 지대를 굽이쳐 흐르는 보성강, 섬진강 유역에는 영산강 유역이나 해남 반도처럼 넓은 평야지대가 없어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뿐만 아니라 외부와도 단절되어 있어 새로운 문화를 접할 기회도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고, 설사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었다 하더라도 강한 토착성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강한 토착성은 고유문화를 뿌리내리게 하지만 한편으로 문화의 발전을 더디게 하는 역기능도 있다.

석평유적

현재 191개 소, 1천570여 기에 달한 보성강 유역의 지석묘 군은 한 지역에 대규모로 조영된 것이 아니라 소규모로 분산되어 있다.

높은 산악지대를 흐르는 보성강은 장년기의 당당한 모습으로 수량이 풍부하고 유속이 빨라, 노년기의 느릿한 흐름을 가지고 있는 다른 지역 강들과 비교된다. 이 때문에 보성강 유역은 작은 분지나 지류의 침식 활동으로 형성된 소규모 침식평야들이 대부분으로, 영산강처럼 넓은 평야지대가 없어 작은 규모의 읍락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마한 소국들이 산곡(山谷)에 흩어져 있었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최근 발굴 조사된 보성 도안리 석평 유적은 시굴 면적이 9만2천96㎡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 유적인데, 그 절반에 달하는 중복 주거지와 공방 유적을 통해 커다란 정치체가 형성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출토 유물을 통해 자급자족적 경제 기반을 갖추고 있어 사회 발전이 나타날 여지가 거의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50㎡가 넘는 주거지가 나타나는 등 규모가 점차 확대되고 있는 것을 통해 집단 내의 위계화가 차츰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석묘군에서도 거대 지석묘가 눈에 띄지 않고, 대형 주거지 역시 읍락 안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비록 수장이 있다고 하나 민간에 잡거하여 통제력이 약하고 성곽도 없었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처럼 연맹장 세력이 연맹 전체를 완전히 장악할 정도로 강대하였다고 볼 수 없다.

한편 산악 지대에 둘러싸인 보성강 곳곳에 형성된 소국들의 분립성과 토착적 전통은 읍락 별로 무리를 지어 묘제로 오랫동안 기능하고 있는 지석묘를 통해 확인된다. 이처럼 소규모 정치체가 지속이 되면 통합을 저해해 연맹왕국의 발전을 더디게 한다. 석평 유적에서처럼 별도의 공방이 있는 등 독립된 생활체가 형성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 통합 작업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립성과 토착적 전통은 정치적 통합을 지향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지만, 때로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다.

원형과 방형의 주거지가 공존하고 있는 석평 유적에서 처음에 형성된 원형 주거지가 차츰 방형 형태로 바뀌고, 원형보다 방형의 비중이 높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원형은 주로 경남지역을 비롯해 전남 동부지역의 주거지 형태이지만, 방형은 서부 영산강 유역 형태로 알려져 있다. 보성강 유역이 방형을 새로운 주거지로 받아들인 것은 큰 주거지를 만드는 데 원형보다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보성강 유역에서 주로 출토된 타날문 토기가 해남 군곡리 유적, 보성 금평 유적과 조성리유적, 순천 낙수리 유적 출토 토기에서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마한 남부 연맹체 내부에서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보성강 유역의 원형 주거지에서는 전남 동부 지역은 물론 영산강 유역 등 다른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은 공열 토기가 나오고 있고, 장방형 주거지에서 타날문 토기 등이 출토되는 등 독특한 특징이 보이고 있다.

이처럼 보성강 유역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화 현상은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의 반영이라 생각된다. 이를테면 오랜 분립성을 강고하게 가졌던 보성강 유역 연맹체의 특성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보성강 유역 연맹체들은 전남 동부지역 문화는 물론 서부 영산강 문화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심지어 석평 유적과 송림 유적의 가야식 고배에서 알 수 있듯이 소가야 지역과 교류를 하고 있다. 이를 두고 보성강 유역이 전남 동부와 서부 두 지역의 점이 지대에 해당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보성강 유역 연맹체들이 산악 지대에 가로막혀 폐쇄적인 성격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보성강을 통해 외래문화를 받아들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토착적 전통에 새로운 문화를 가미한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냈다고 하겠다. 이러한 과정에서 보성강 유역 문화의 특질이 형성되었다고 믿어진다. 이는 고유 양식보다는 가야, 백제, 영산강, 왜 등 외래요소가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해 문화 점이지대의 성격이 강했던 득량 지중해 연맹왕국과 비교된다.

결론적으로 전남지역 곳곳의 지석묘 분포 등을 통해 확인된 분립성과 견고한 토착성은 기본적으로 상호 배려의 정신을 뿌리 깊게 인식하는 전라도 정신의 토대가 되었고, 고유성을 기반으로 외래문화 수용에도 인색하지 않은 전통은 외래문화에 포용적이면서도 결코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이 지역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아갔음을 알 수 있다. 박해현 시민전문기자(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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