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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

토기·고분 등 독자문화 형성한 고대왕국의 원형

입력 2021.02.09. 09:27 수정 2021.02.16. 11:39
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Ⅱ
<9> '마한 르네상스'를 꽃피운 '영산 지중해', 馬韓
신촌리 금동관

필자는 '영산 지중해'라는 말을 잘 쓴다. 서구 문명을 꽃피운 '로마의 호수 지중해'처럼 광활한 호수를 형성한 영산강이 대륙과 해양의 문화를 융합한 마한 문명을 꽃피웠기 때문에 '영산 지중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표현에 대해 마한에 관심을 갖는 일반 대중들은 적절한 표현이라는 의견을 줬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 용어가 쉽게 다가서지 않은 것 같다. 영산강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현지 조사할 일로 나주의 이곳저곳을 찾았다. 역시 '역사의 도시, 나주'임을 실감한다. 고대 마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발전과 그 궤적을 함께 한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를 현재 관점에서 녹여낼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 하겠다.

그동안 본 지면을 통해 한국사의 뿌리인 마한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정리했다. 마한사를 사랑하는 독자들 가운데 필자의 부끄러운 글을 스크랩거나 밴드에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은 기존의 관념에 묶여 마한 역사가 무엇이며, 왜 중요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필자의 주장이 생경한 탓이기 때문이다. 이에 그동안 강조한 영산강을 중심으로 한 마한 남부 연맹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려 한다.

중국 기록에 마한에서 진한·변한이 나왔고, 백제가 나왔다고 한다. 마한이 한국 고대사의 원뿌리임을 말해준다. 일본에서 '백제(百濟)'를 칭하는 '구다라(くだら)'도 실은 '마한'을 상징하는 '매(鷹)'에서 비롯됐다. 매는 일본어로 '구찌', 곧 '구찌가 있는 나라'라해서 '구다라'라고 했다. 마한이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임을 말해준다. 마한은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6세기 중엽까지 한국사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4세기 후반 백제에 복속됐다는 '백제의 마한' 인식이 우리의 의식에 각인돼 있다 보니 마한사의 중요성을 놓치고 말았다. 이는 마한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식민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통념이 주된 이유였다.

신촌리 9호분 출토 각종구슬

마한 54국 가운데 '영산 지중해'의 마한 연맹체들이 '마한 르네상스' 문명을 창조해냈다. 영산강 유역의 수많은 유적·유물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몽촌토성·부여·공주에도 없는 대형 고분들이 밀집돼 있는 시종·반남 일대의 거대한 고분군들은 이곳이 마한의 중심지였고, 大國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준다. 해남·강진 일대의 '침미다례', 영산 지중해의 '내비리국', 영암 지역 '일난국', 다시들 유역 '불미국' 등이 그들이다. 이들 왕국은 '용맹스러움'을 뜻하는 '응류(응준)'로 상징되는 마한 연맹체를 구성했다. 이곳에는 토착적인 요소에 낙랑, 백제, 가야, 왜 등 각 나라의 다양한 문화 요소가 융합돼 독창적인 문화가 형성됐다. 이러한 문화의 특징이 보성강, 섬진강 유역에도 영산 지중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나타나고 있어 역시 같은 마한 연맹체의 세력권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3세기 말 백제의 팽창에 맞서 마한 남부 연맹을 결성했다.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의 보주가 달린 3단의 가지 장식은 백제나 신라 양식보다는 가야나 왜 계통에 가깝고, 같은 곳에서 출토된 환두대도 또한 기본형은 백제에 가까우나 환내도상을 별도로 끼워놓은 것은 대가야 계통과 유사한 데다 제작 기법도 무령왕릉보다 시기가 앞선다. 이로 보아 반남 지역 왕국에서 제작한 왕관임이 분명하다. 이를 백제 양식으로 해석하여 백제의 영향력 확대의 근거로 살핀 것은 잘못이다. 2019년 7월 신촌리 9호분 출토 왕관의 영락(瓔珞)과 동일한 '편(片)'이 반남과 인접한 시종 쌍고분(雙古墳)에서 출토돼 두 지역이 하나의 정치체임을 알려줬고, 고대 마한 왕국의 중심지였음을 확인시켜 줬다. 5세기 후반에 완성돼 일본으로 전파된 토기 가운데 독특한 '집흔' 문양이 있는 토기가 있다. 이 토기는 주로 영산강 유역에서만 출토되고 있는데, 역시 같은 지역에서만 출토되는 승석문 토기와 더불어 백제, 일본 토기와 비교하여 뚜렷한 지역적인 특색이 있다 하여 일본에서 '영산강식 토기'라 부르고 있다.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5∼6세기 무렵에 유행한 이들 토기는 백제 지역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고, 형식적인 면에서도 구별되고 있다. 백제에서 주류를 이룬 유개고배, 전형적인 직구단경호 등이 6세기 무렵에 이르러 영산강 유역에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고유한 영산강식 토기 전통이 6세기 전반까지 유지되됐음을 알려 준다. 이는 이 지역의 토착 세력의 강력한 힘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데 가야 계통의 방사상과 일본 계통의 원형 양식을 융합해 창안된 영암 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 토괴(土塊) 축조 양식이 가야·일본 지역으로 다시 전파되고 있는 데서 재지 세력의 강고한 토착성에다 외래 요소가 가미된 이 지역의 개방적인 문화 특징을 엿보게 한다.

신촌리 9호분 세잎장식큰칼

5세기 무렵부터 나타난 왜계 토기들이 전방후원형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광주 월계동 1호분 고분에서는 수에키 토기 계통의 개배, 고배, 유공광구소호 등의 모방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왜의 하니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통형 분주 토기는 토착화된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신라계 토기 계통으로는 개(蓋)와 장경호 등이 있는데, 6세기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주 영동리 3호분 석실묘에서 출토된 개와 삼족배는 소성 흔적으로 보아 신라 지역과 직접 교류를 한 흔적으로 여기고 있다. 신촌리 9호분 출토 유물에서도 백제계보다 왜계, 가야계 문화 요소가 많이 보인다. 영산 지중해 지역이 기원 이전부터 낙랑과 가야, 왜를 연결하는 중심지였다는 점을 살피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백제가 차령 이북 지역의 마한 맹주인 목지국을 복속하자 그 이남의 연맹체들이 '마한 남부 연맹체'를 결성하면서 대립 구도가 본격화됐다. 3세기 말 침미다례와 함께 중국에 조공하러 간 마한의 20여 국이 바로 그들이다. '양직공도'의 '방소국(傍小國)'에 해당하는 마한 왕국들이 모두 전남 지역에 있고, 성왕이 지방행정 제도를 정비할 때 추가로 편성된 15개 郡이 모두 노령 이남이라는 점은 6세기까지 마한 연맹체가 한반도 서남부 일대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영산 지중해 일대의 정치체들이 마한 연맹체의 본류임을 확인해 준다. 마한에서 백제가 나오고, 변한과 진한이 나왔으며 변한에서 가야가 나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영산 지중해 '마한 왕국'이 한국 고대사의 원형임을 분명히 해준다. 그러나 아직도 마한의 중심을 한강 유역에서부터 찾거나. 그곳에 있던 마한 세력이 남하하여 영산강 유역에 종착점을 형성했다는 주장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제 역사적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갈 필요성을 느끼는 이유이다. 박해현 마한역사문화연구회 마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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