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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종 박사의 고고학 산책

조현종박사의 고고학 산책 <14> 평양에서 온 국보들

입력 2020.05.20. 10:51 수정 2020.05.20. 18:44 @조덕진 moleung@gmail.com
민족사의 숨결 문화재 남북 교류 이어져야
삼족오가 새겨진 금동투조 장식(평양 진파리 7호 출토, 국보, 22.5cm, 고구려, 조선중앙역사박물관 소장)

20여 년이 지났다. 1999년 나는 한국문화재의 유럽순회전시를 위해 독일 에센(Essen)의 빌라휘겔(Villa Hugel)에 머물렀다. 에센은 과거 라인강의 기적, 독일공업의 어머니로 불리는 산업도시였지만 석탄산업이 퇴조하자 '문화'로 도시재생을 성공시킨 몇 안 되는 문화도시이다. 전시의 주제는 '한국의 고대왕국-한국인의 혼을 찾아서'였고, 청동거울과 반가사유상, 신라금관 등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 321점이 출품되었다. 6월 5일 개막된 전시는 독일 현지인들과 유럽에서 한국학 및 동양학을 연구하는 전문가들, 그리고 전 유럽 교포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

보통 대규모 국제전시는 개막과 더불어 몇 차례의 초청회와 언론 기자를 위한 공식적인 인터뷰가 진행된다. 그러나 가끔은 예고 없이 방문하는 경우도 있어서 현지에 파견된 큐레이터를 전시장에 얽매이게 한다. 7월 어느 날, 서부 독일 최대의 신문인 '베스트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기자가 찾아왔다. 몇 가지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고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즈음, 다시 그가 물었다. '전시품이 남한에서 온 유물인데 왜 북한을 포함한 한국으로 설명하는가?'. 말하자면 북한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한 점도 없는데 남한의 유물만으로 북한을 포함한 한국문화로 설명하느냐는 것이었다. 제3국의 기자에게 우리 민족사의 과정을 설명하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직감한다. 여러 정황이 더해진 질문은 난해하였지만, 그날 이후 북한의 문화재는 나의 숙제가 되었다.

그리고 2004년 8월, 개성공단 문화재조사 현장설명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빗살무늬토기(평양 표대유적출토, 국보, 신석기시대, 높이 90cm, 조선중앙역사박물관 소장)

개성공단 건설에 따라 시설이 들어설 지역의 유적을 발굴하고 그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였다. 분단 이래 처음으로 남과 북의 조사기관(한국토지공사박물관과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발굴현장에, 그것도 유서 깊은 역사도시인 고려 왕도 개성에 간다는 사실은 가슴 뛰는 일이었다. 서울에서 개성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군사분계선을 넘어 개성 봉동읍 현장에 도착하자 조사경과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곧 발굴현장으로 안내되었다. 나는 현장에서 석기류와 토기류 등의 유물들을 꼼꼼히 관찰하고 원삼국시대의 집터, 고려와 조선시대의 건물지, 분묘 등을 살필 수 있었다. 개성박물관과 현화사탑, 선죽교도 그때 보았다. 새롭지만 익숙한 민족의 유산에 대한 최초의 경험이었다.

사실, 북한 문화재는 참여정부 시절 용산에 세워진 새 국립중앙박물관의 개관전시 컨셉이었다. 개관에 맞춰서 북한의 문화재를 함께 전시하여 분단된 상태일망정 민족문화의 전개 양상을 제대로 살펴보게 하자는 의도였다. 2004년 개성방문에서 얻은 경험은 북한 문화재전시가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니라 실질적인 수행의 동력이 되었다. 2005년 5월, 직접 전시실행계획을 담은 제안서를 재일본 조선역사고고학협회를 통해서 평양에 전달하였고, 그해 7월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8월, 나는 베이징으로 가 전시를 위한 기본각서에 서명하였다. 이어서 수차례의 실무협의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전시는 아쉽게도 국립중앙박물관의 개관 이후로 연기되었다.


관찰과 협의를 위해 모아 놓은 전시대상 유물들-왕건상도 보인다.(평양,2006)

그 뒤 몇 차례의 협의를 거쳐 2006년 4월 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동료 및 문화방송의 전시 협력자들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였다. 서울에서 전시될 유물의 실사와 최종적인 목록의 확정, 운송 등을 협의하기 위한 4박 5일의 일정이었다. 우리는 대동강의 양각도호텔에 머물렀으며 주로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서 전시대상 유물을 관찰하고 논의하였다. 이때 혁명광장을 중심으로 들어선 민속박물관과 미술박물관을 방문할 수 있었다. 북한은 해방 후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문화건설을 내세우고 1945년 12월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을 세웠다. 방문 당시의 박물관은 진열장이나 조명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전시유물, 특히 고고학 유물은 그 수량이나 종류, 내용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해방 초기부터 한흥수와 도유호 같은 유학파 고고학자가 활동하였고 일제가 왜곡한 역사서술을 극복하기 위해 특히 선사시대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박물관에서 협의가 진전된 뒤에는 대성산성을 지나 강동의 단군릉과 고인돌, 역포구역의 동명왕릉을 비롯한 평양 시내 및 인근의 유적들을 답사하였다.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고조선 전차

평양에서 최종적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민족사 전시기에 해당하는 대여협상을 완료하였다. 태조 왕건상 등 국보 50점과 고려 금속활자 등 준국보 11점이 포함된 전체 수량90점을 확정하고, 한 달 뒤인 5월, 금강산에서 만나 평양에서 옮겨 온 전시유물을 인수하였다. 2006년 6월 12일, 우리의 특별전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이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막되었다. 독일에서의 숙제- 반세기의 분단 역사는 반만년의 유구한 민족사를 결코 넘을 수 없고 민족문화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북 국보 남녘 나들이', '서울 온 북 문화재', '반갑다! 북 문화재' 등의 제목이 보여주듯 언론의 관심도 남달랐다. 물론 말할 수 없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평양에서 온 국보들은 무사히 전시를 마쳤으며 그해 11월 30일 금강산에서 반환되었다.

당시, 북한 문화재의 전시계획과 진행, 반환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는 조선중앙역사박물관과 문화지도보존국, 민족화해협의회,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문화방송 등 여러 기관의 집단적인 헌신이 있었다. 또한, 전시가 성사되기까지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문화지도보존국의 리숭혁처장과 한국민예총의 김용태회장은 벌써 고인이 되셨다. 이분들의 애정어린 협조는 가슴 뭉클하여 눈물이 날 정도였다.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는 분단의 역사지만 남북공동의 문화재 조사와 보존, 연구 및 교류사업은 민족사의 숨결을 잇는 마중물이다. 도보다리가 생각나는 시절이다.

조현종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과 학예연구실장, 국립광주박물관장을 역임하고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했다. 1992년부터 사적 375호 광주신창동유적의 조사와 연구를 수행했고, 국제저습지학회 편집위원, 고고문물연구소 이사장으로 동아시아 문물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한국 초기도작문화연구' '저습지고고학' '2,000년전의 타임캡슐' '탐매' '풍죽' 등 연구와 저작, 전시기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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