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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완의 기찬여행 강진 병영성 조선시대 전라도의 육군훈련 및 지휘 기능 담당 사령부 있던 곳
입력 : 2016년 03월 11일(금) 00:00


강진 병영성 조선시대 전라도의 육군훈련 및 지휘 기능 담당 사령부 있던 곳

광산구 송정동 고내상성지

태조때 병영 설치하며 축성

왜구 침탈로 강진으로 옮겨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협곡 차단하면 철옹성 요새

배후엔 산악요새 수인산성

건물들 사라져 폐허로 남아

사적 지정 이후 본격 복원

성곽, 남문, 동문 등 들어서

병영은 마을행정까지 관할

상권 발달 후손들 명맥 이어

우리는 강진 병영성(兵營城)이라고 불렀다, 성곽은 허물어지고 겨우 얼마간의 석성의 흔적과 함께 초등학교가 성내 자리하고, 학교 주변에는 밭농사를 짓고 있었고, 허물어진 석성 사이 돌무더기 위로 학생들은 학교를 넘나들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25년 전 첫 조우의 병영성이였다. 그리고 얼마간 잊고 지내다 문득 병영성이 보고 싶었으나, 좀체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영랑 생가와 붙어있는 시문학파기념관의 김선기 관장이 오래전 문화전문기자로 활동하던 때 썼던 ‘전라도 성터 이야기’란 책을 우연하게 헌책방에서 만나 거기서 잊었던 병영성을 다시 만났다.

아마도 병영성과 광주와 인연을 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할 것 갔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 지정된 광산구 송정동에 있는 고내상 성지(古內廂 城址)는 1397년(태조 6) 전라도 병영을 이곳에 설치하면서 축성한 성이다. 전라도 지방의 육군 사령부가 있었으나 왜구의 침탈로 1471년(태종 17)에 해안이 가까운 강진의 병영성으로 옮기면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재현서삼십리 석축 주일천육백육십일척(在縣西三十里 石築 周一千六百六十一尺)'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처음에는 돌로 쌓은 성임을 알 수 있다. 송정동 용보촌·상전·고내상 일대인데, 성벽은 거의 무너져 없어지고 송정동 일대에만 흙으로 쌓은 토성 일부가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터는 길이 170m, 너비 8.5m, 높이 1.45m로 흙을 일정한 두께로 다져가면서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성을 돌로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성의 바깥쪽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쌓은 편축법(片築法)을 사용한 성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의 지명(地名)에는 성(城)과 관련된 이름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광주비행장을 ‘성안엣들’, 고내상 서쪽의 들녘을 ‘성너맷들’이라고 부르며, ‘성동(城洞)‘이란 지명을 가진 마을도 있다.

사적 제397호 전라병영성 '병영(兵營)'은 조선시대 지방군사 조직이다. 남해안 일대의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강진 병영성(강진군 병영면 성동리)은 조선시대 전라도의 육군훈련 및 지휘부 기능을 담당했던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그 당시 조선 주요 요충지에 지방군사 시설인 병영이 있었다, 동강현과 탐진현을 병합하여 지금의 강진현에 전라도 군사사령부이자 훈련소를 설치하였다. 병영성 일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 월출산에서 발원한 탐진강의 지류인 금강천이 작천과 병영 평야를 적시고 있어, 험준한 산 사이의 협곡만 차단하면 철옹성 요새로 군량미 걱정 없는 평야와 풍부한 물이 있으며, 그리고 배후에는 산악요새 수인산성을 끼고 있는 군사시설 이였다.

강진 병영성은 5개의 영(營)과 53주(州) 4성(城)을 통할하던 군사 요충지로, 김선기 문화전문기자는 ‘전라도 성터 이야기’ 책에서 城의 규모 및 연혁을 '강진 병영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에 쌓은 길이 1천60m 가량의 평지성으로써, 성벽의 기초가 되는 아랫부분이 잘 남아 있다. 성곽 시설로는 수구문 3개소를 비롯 옹성 7개소, 건물터, 초석과 25기의 비석(면사무소 안)이 남아 있다. 성 안쪽에는 병영초등학교와 학교 관사, 민가 1동이 있으며 나머지 지역은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다'고 기술해 놨다. 내가 25년 전에 봤던 흔적이었다.

'강진군지'와 '조선환여승람'에 따르면 마천목(馬天牧)이 병마절도사로 와서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마천목은 장흥 출신으로 조부(祖父)인 마치원(馬致遠)이 장흥 수령성을 축조하였고, 부친 마영(馬 榮)도 왜구의 침탈을 막아 싸웠던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1895년의 '병영영지(兵營營誌)'에는 창설 당시 마 병사가 일망대에 올라가서 활을 당기며 말하기를 ‘후세에 활 쏘는 자들 중에서 내가 쏜 곳까지 미치는 자가 없을 것이다. 또한 적의 화살도 이르지 않을 것이니 내 화살이 떨어진 곳에 성을 쌓도록 하라'하여 그 곳에 성을 쌓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병영성의 건립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마천목과 병영 건립의 밀접한 관련성을 암시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강진 병영성의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이후 간행된 각종 지리지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병영성의 둘레를 561보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후의 지리지들에는 거의 공통적으로 2천820척으로 나와 있다. 이와 함께 강진 병영성에는 치(雉)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없어 아쉽다. '치(稚)'는 성벽과 성벽이 만나는 지점과 적을 관찰하기 쉬운 성벽의 특정 지점에 설치하는 일종의 성 축성의 양식이다. 실제 이 성은 현지 조사에서 성벽의 교착점 4곳과 동벽 2곳, 서벽 2곳에 치가 설치된 흔적이 발견된다. 병영성이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지점에도 치가 설치되었을 가능성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 급수 시설과 관련한 우물은 '문종실록'에는 4개소, '대동지지'에는 5개소, '병영지'는 9개소로 기록돼 있다. 이 보다 다량의 물을 확보할 수 있는 지(池)의 경우는 '대동지지'에 2개소, '병영지'에 5개소로 나와 있다. 시기가 내려올수록 조금씩 수가 늘어나고 있어 당시 성의 규모를 가늠케 하며, 강진 병영성 주둔군과 관련해서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에는 정군(正軍) 498명, 수성군(守城軍) 51명, 조역군(助役軍) 163명, 장인(匠人) 141명이 소속돼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로 대략 350여명이 주둔했다가 대폭 줄어들었다.

성 안에는 객사인 청심각, 동헌인 운주헌을 비롯하여 누각인 망미루, 공무루 그리고 군기고를 비롯한 각종 공공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다. 지금은 건물들이 모두 사라져 폐허로 남게 되었지만 1997년 사적 지정 이후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원을 시작하여 성곽, 남문, 동문 등을 복원하였으며, 나머지도 점진적으로 복원을 할 계획 이라고 한다.

병영은 이것 뿐 아니라 지방관이 군사적인 업무를 겸하였기 때문에​ 전라병영성의 역할은 단순히 군사업무만 관장했던 것은 아니고 인근 4개면 57개 마을의 행정까지 직접 관할하기도 하였다, 성내에서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의 형태가 병영상인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상권이 발달하여 지금도 많은 후손들이 호남 상권의 한축에서 병영상인의 맥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