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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오는 길목에 강진 영랑 생가를 가다
입력 : 2016년 03월 18일(금) 00:00


모란 꽃망울 터뜨리는 찬란한 슬픔의 봄 기다리는 듯

강진고을 부농 맏아들로 태어나

유년기 친구들과 어울리며 성장

13살때 결혼했으나 다음해 사별

1948년 서울로 이사한 후

몇차례 주인 바뀌다 군에서 매입

1992년 원형 복원 민속자료 승격

곳곳에 시와 걸맞는 시비 배치돼

시 한편 읽고 풍경과 분위기 음미

영랑에 심취하며 보내기 좋은 공간

마당 뒷편에 멋들어진 현대식 건물

시문학파 시인들이 모이던 아지트

그들의 흔적과 작품들 만날수 있어







요즘 남녘에는 산수유, 매화, 목련 등이 봄을 맞이하듯 꽃망울을 터뜨릴 때, 영화 ‘동주’가 세간에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나도 그들과 대화의 축에 끼려고 다녀왔다. 그리고 발길을 강진으로 돌려 동주보다 앞서 태어나 동주보다 더 늦게까지 같은 길을 걸었던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선생의 생가에서 물끄러미 영랑을 그려본다.

김영랑(1903-1950)은 강진군 남성리 탑골 마을의 북산 아래에서 태어났으며, 영랑의 아버지 김종호는 500석 정도를 거두어들이는 지주로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강진 고을의 유지였다. 강진 고을 부농의 5남 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난 영랑은 유년기에 동네친구들과 어울려 뒷산의 바위나 집 주위의 감나무 밭이나 동백나무 숲을 놀이터로 삼아 성장하였다. 영랑은 1909년 봄부터 북산골에 있는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11년에는 강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에 졸업하였다. 그의 나이 열세 살 때인 1916년에 김은초와 결혼하였으나 다음해에 곧 사별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이별의 아픔을 간직하게 된 것 같다.

장흥에서 강진읍으로 들어오는 '영랑 로터리'에 우리나라 서정시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히는 김윤식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북에는 소월이라면 남에는 영랑’이라던 그 시절 시문학에 쌍벽을 이루면서 영롱한 서정적 싯귀는 오늘날에도 아낌없는 찬사로 회자되고 있는데, 영랑은 그의 시심이 뿌리를 내린 고향 강진에는 서서히 꽃망울이 터뜨리면서 모란이 피는 찬란한 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철딱서니 없던 학창시절 아무런 뜻도 의미도 모른 채 작은 시집 옆구리에 끼고 여학생 앞에서 폼 잡고 읽어내려 갔던 시절을 그려보며 영랑 생가 앞에 쓰인 싯귀를 읊조린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영랑생가는 잘 보전 되어 있다. 한국 시문학사의 성지처럼 많은 문학도들의 순례지가 되어 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이사한 후 몇 차례 집주인이 바뀌었으나 1985년에 강진군에서 매입하고 이듬해 지방기념물로 관리하여, 가족들의 고증에 따라 1992년에 원형대로 복원 되었다. 그리고 2007년에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로 승격 지정 되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영화의 세트장처럼 좀처럼 보기 드문 초가집들이 안채, 사랑채, 문간채가 모여 있어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는 현장이다.

영랑생가에는 곳곳에 영랑을 생각하게 하는 시비들이 시와 걸맞게 배치되어 있다. 마당가에 서있는 감나무, 지금은 고목이 되어버렸는데, 누이가 가을날 장독대에 감나무 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오메! 단풍 들것네' 하고 내뱉는 한마디를 그는 아름다운 시어로 바꾸어 써 놓았다. 장독대를 보고 출가한 누이를 그리며 썼다는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시비도 있고, 마당에 샘 옆에는 '마당 앞 맑은 새암물'이, 그리고 뒤꼍 살짝 언덕배기 동백나무 아래에는 '동백닙에 빗나는 마음' 시비가 자리하고, 돌담 담장에 보일 듯 말 듯 한 곳에는 '내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가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 툇마루 앉은뱅이 책상에서 마당의 정원을 바라보며 늘 글을 쓰던 영랑은 '사개틀린 古風의 툇마루에서' 시비가 남겨져 곳곳에 숨은 그림 찾기처럼 시 한편 읽고 풍경과 분위기에 음미하며 영랑에 심취하며, 한나절 사랑채에서나 안채에서나 여기 저기 걸쳐 앉아 쉬면서 보내기 좋은 공간이다.

영랑은 8·15광복 전까지 이곳에서 무려 60여편의 서정적인 주옥같은 시를 썼으며, 그가 남긴 시는 87편 이여서 많은 시가 이곳에서 쓰였다.

안채 뒤쪽에는 동백이 피어 있는 언덕배기며, 집안 이곳저곳을 들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강진 지방에서 사용하던 농기구며 장독 등 세간살이를 갖다 놔, 금방 이라도 부엌 아낙네가 어디서 툭 튀어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집 마당 돌담 따라 살짝 돌아서면 멋들어진 현대식 건물이 있다. 이곳은 1930년대 창간된 시전문지 '시문학'을 중심으로 순수시 운동을 주도했던 시문학파 시인들이 다시 모여있는 아지트다. 이름도 쟁쟁한 용아 박용철, 영랑 김윤식, 정지용, 위당 정인보, 연포 이하윤, 수주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허 보 등 당대에 최고의 시인들과 조우 할 수 있다. 이들은 1930년대 시문학파의 핵심 인물들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로 카프문학과 감각적 모더니즘에 휩쓸리지 않은 채 이 땅에 순수문학의 뿌리를 내리게 한 모태가 되었던 선각자들의 흔적과 작품집 등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