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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답사 일번지 강진]"정약용 선생처럼 걸으면 누구나 선비"
입력 : 2016년 05월 04일(수) 00:00


다산초당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한국최고의 산책길’ 각광

강진은 조선시대 최고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삶과 사상, 철학이 살아있는 땅이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산책길을 걷노라면 누구나 선비가 될 수 있다.

강진은 드라이브와 볼거리 그리고 먹거리가 그야 말로 진수성찬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이브와 휴식으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여행을 하시는 것도 좋을 듯 싶다.

만덕산의 동백림과 진달래 꽃길을 지나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사이의 ‘한국최고의 오솔길’ 이 길이 바로 다산 선생과 혜장선사가 학문적 교류를 위해 수도 없이 거닐었던 오속길이다. 차나무, 떡갈나무, 상수리 나무 등이 우거져있는 한국 최고의 산책길로 명성이 높다.

정약용이 40세에 황사영 백서 사건(신유박해이후)에 연루되어 58세까지 무려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다산초당. 그곳에 가면 목민심서를 쓰고 화성 행공을 위해 거중기를 설계하던 다산의 나라 사랑과 한(恨)이 서리서리 녹아 있다. 주변 동백림은 천연기념물 제 151호로 지정되어 있어 이번에 한번 둘러보자.

당시 다산 선생의 사상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개혁과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소위 실사구시(實事求是)학문이었다. 그러나 외세를 배척하고 불교문화와 유교사상을 장려하는 세도의 권력에 탄압을 받았다.

다산의 형 약전의 사위 황사영이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를 탄압하는 사건들을 적어 청나라 주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써 보내려다 발각됐다. 그것이 ‘황사영 백서사건’이다. 이 일로 황사영은 사형되고 다산과 형 정약전 선생은 공범으로 지목돼 유배되었다.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돼 불후의 수산전문서인 ‘자산어보’를 남겼고 정약용 선생은 여러 저서 중 방다와 관련해서는 해양경영서 ‘경세유표’를 남겼다.

강진땅이 ‘남도답사 일 번지’로 올라온 것은 다산(茶山) 정약용의 18년 유배지가 여기였고, 여기에서 학문이 결실을 맺게 되었고, 여기에서 그의 숱한 저술, 저 유명한 '목민심서'가 집필되었기 때문이다. 다산의 유배지를 답사하는 사람들은 곧잘 다산초당으로 직행하는데 사실 그분의 강진 유배처는 네 번 옮겨졌다.

유배 온 귀양 객을 사람들이 마치 대독으로 여겨 파문괴장하고 달아날 째 그를 가련히 여겨 돌봐준 이는 술집이자 밥집인 오두막 노파였다고 한다. 다산은 이 오두막엣 무려 4년을 지냈고 그 집 당호를 ‘마땅히 지켜야 할 네 가지’라는 뜻으로 사의재라 했다고 한다. 그 집이 지금 샘물이 샘거리 라고도 불리는데, 강진읍 동문에 복원되고 있다.

강진읍내에서 다산초당까지는 자동차로 불과 10여 분밖에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유배지로 가는 길을 실감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길이 포장되지 않았던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다산초당을 찾아가는 맛이 참으로 별스러웠다.

다산초당의 툇마루에 앉아보았자 남향집이건만 동백 숲과 대나무잡목이 우거져 한낮인데도 컴컴하고 앞에 보이는 것이 없다. 단지 뜰 앞에 넓적한 돌이 하나 있고 왼쪽에 연못이 있는데 이것은 초당 오른쪽 바위에 새겨놓은 ‘정석(丁石)과 함께 정약용 유배시절의 진짜 유적인 것이다.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난 지 3년 되는 1821년, 당시 육순 때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지은 장문의 자찬묘지명을 편찬했다. 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 글에 따르면 다산초당의 모습은 이렇게 그려져 있다.

무진년(1808)봄에 다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축대를 쌓고 연못을 파기도 하고 꽃나무를 벌여 심고 물을 끌어다 폭포를 만들기도 했다. 동서로 두 암을 마련하고 장서 천여 권을 쌓아두고 저서로서 스스로 즐겼다. 다산은 만덕사의 서쪽에 위치한 곳인데 처사 윤단의 산정이다. 석벽에 ‘정석’두 자를 새겼다.

지금 초당 연못의 석축과 긴 대통으로 물을 끌어 오줌발보다 조금 굵은 폭포를 조작한 것이 그때의모습인 것도 같다. 뜰 앞의 큰 넙적 바위는 ‘다조(茶竈)’라고 해서 차를 그곳에서 달였던 곳이다. 그리고 정석 두 글자는 단정한 해서체로 크고 깊게 새겨져 있다.

다산초당을 찾은 답사 객은 어둡고 습한 초당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너나없이 동암 바로 옆에 있는 천일각으로 빠져나가 거기서 멀리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구강포와 도암만을 바라보며 쾌재를 부른다. 그 풍광의 시원한 눈맛이란 가보지 않은 자에겐 설명할 길이 없다.

갑오농민전쟁 때 동학군이 선운사 마애불 배꼽에서 꺼냈던 비기는 곧 '목민심서'였다는 전설, 심지어는 베트남의 호치민이 주정과 비리의 척결을 위해서는 조선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필독의 서라고 꼽은 사실, 호치민은 잠자리에 들 때에도 베개 맡에 항상 놓고 잠을 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다산초당의 진달래 꽃길을 지나 만덕산의 천연기념물 동백림이 어우러진 ‘한국최고의 오솔길’을 따라 백련사에 도착한 후,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마량미항과 강진앞바다의 진객인 시베리아 고니가 월동하는 강진앞바다, 도암만 주변의 해안도로와 만덕산, 주작산 등 산악경관도 수려하다.강진=김원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