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2(화)광주 11ºC
쉼 > 레포츠
한유진의 문화기행
입력 : 2016년 09월 07일(수) 00:00


역사앞에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오늘의 삶을 묻는다.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있는 안중근의사 단지비
안중근 단지비 앞에 열 두명 독립지사들의 비장한 각오 그려져

두만강 언저리까지 보고 싶어 초소에 접근하다 러시아 군인에게 억류

큰 가지가 꺾여 나갈 때 값없이 떨어뜨려진 이름 없는 꽃들의 슬품

안중근의사 단지비가 있는 크라스키노로

기온은 다시 툭 떨어져 크라스키노의 단지비 앞에 내렸을 때는 내의를 껴입었는데도 호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는 것이 싫을 만큼 추웠다.

바람 바람 바람. 언젠가 이곳을 기억할 때 나는 저 황황한 들판에 불던 매서운 바람부터 떠올리겠지. 예를 갖춰 모두 절 이배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뒤로는 산, 앞으로는 허허벌판, 1909년 그날의 이곳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미 두 번이나 단지비를 이전했었다고 하니 꼭 이 자리는 아니겠지만 열 두 분 독립지사들의 비장한 각오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젊은 자신의 삶을 투신하겠다고 결심하고 네 번째 손가락을 끊던 그 순간에, 어떤 표정들을 짓고 계셨을까. 말없이 형형한 눈빛으로 바닥에 펼쳐진 태극기만을 내려다보고 있었을까? 최성남 선생이 대금을 꺼내들고 가부좌를 틀었다. 구슬픈 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찢듯이 뚫고 나왔다.

모두들 잡담도 없이 두만강을 향해 달렸다. 저 멀리 왼쪽으로 푸른빛이 반사되는가 싶더니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포시에트’라는 곳에서 잠깐 차를 세웠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해안이 아늑해 보이는 곳이었다. 국경을 넘어왔던 이들이 첫 둥지를 틀었다는 곳. 유민들은 이곳을 ‘목포’라고 불렀다지. 낯 선 땅에 고향의 이름을 붙여두고 그리움을 달랬었던가 보다. 고향에서 흘러온 물이 이곳에도 닿았을 것이다. 잔물결에서나마 익숙한 그것을 찾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 물을 움켜쥐며 부모와 친구들의 추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들은 두고 온 산천을, 다시 밟을 수 있을지 모를 언덕배기를 생각했을 것이다. 낯선 땅에서 받은 설움을 꾹꾹 눌러 삭혔을 것이다. 오늘처럼 추운 날에도 이곳은 푸근했다.

두만강이 가까워질수록 버려진 황무지가 많았다. 배고픈 사람들의 눈에 저 대지는 얼마나 탐나는 것이었을까. 자식과 아내와 형제를 대기근으로 잃었던 사람들에게 자갈투성이의 척박한 땅 한 뼘은 어떤 의미였을까.



두만강 푸른 물에

핫산, 삼국의 국경지대로 가는 길이었다. 왼쪽으로는 동해에서 흘러왔을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고, 모두들 내려서 짠물에 손을 씻었다. 뜨거운 것이 가슴으로 차올랐다. 오른편 멀리에는 중국의 국경수비대가 보였고, 전방으로는 러시아 초소, 그 뒤로는 북한의 초소가 맞닿아 있는 지역이었다.

두만강 언저리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에 초소에 지나치게 접근했었던지 어디선가 나타난 러시아 군인에게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망원경으로 우리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후 내내 억류되었다가 벌금 고지를 받고서야 풀려났다. 뜻밖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제각각이어서 일행 중 몇몇은 걱정을 했고 몇은 상황을 즐겼다. 억류 되었다고는 하지만 군인들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뿐 별다른 긴장 상태도 없었던 데다가 우리끼리 방치된 채로 오후 시간 내내 면회실로 보이는 방에서 빈둥거렸던 것이 전부였다. 마룻바닥과 나무 테이블, 의자들이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어서 시골 학교의 교실 분위기와 흡사했다. 방에는 군 생활을 안내 하는 러시아 책 몇 권과 간소한 물건들이 있을 뿐이었다. 지루함을 참기 힘들었던 데다 막사 내부가 궁금해진 나는 통역에게 화장실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군대 화장실이 얼마나 험한 곳인지 러시아에 와서 경험하게 될 줄이야. 나무로 지어진 화장실은 무릎 아래쪽 근저리에 뚫려 있었다. 대 여섯 칸 되는 화장실에 사람이 들어있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조였다. 지어진 이래 단 한 번도 청소한 적이 없었을 것 같은 화장실의 더러움. 방으로 돌아와서 사용 소감을 말했더니 남자 분들은, 군대란 곳이 원래 그래. 한국 군대도 별반 다를 건 없어, 라고 했다. 오륙십 대 되신 분들의 군 생활 시절 얘기겠지만, 그래도 역시 문화적 충격임에는 틀림없다. 푸세식 화장실에서 초코파이를 먹으며 인간의 자존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와 인생의 비루함을 맛보았다는 얘기들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우리가 억류된 것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던 걸까? 한 사람씩 사무실로 끌려가 인터뷰를 하고 서류 몇 장 쓰고 난 후 우린 풀려났다. 벌금 고지서를 무슨 기념품처럼 챙겨서 나왔다. 그래도 두만강은 포기할 수 없어서 러시아 군인에게 통 사정을 해서, 그들의 안내를 받아가며 강을 볼 수 있는 지점까지 차를 타고 갔다. 저 멀리 묵묵히 역사를 마주했던 강이 내려다보였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 노래라도 목청껏 불러보고 싶었지만, 러시아 군인들에게 또 한 번 도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음속으로 한 소절쯤을 새기고 그들의 안내를 받아가며 되짚어 내려왔다. 러시아 군용 차량이 돌아간 후에도 우리는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하고 인근 바다를 서성였다. 저녁에는 안내를 맡았던 분들과 함께 회포를 푼 후, 블라디보스톡 시내 호텔에 묵었다. 밤 풍경은 세계 여느 도시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낮과 밤, 핫산과 블라디보스톡의 대비가 묘하게 오버랩 되는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신한비, 우리에게 묻다.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추워졌다. 털이 든 가죽 장갑을 꼈는데도 손이 시렸다. 아침 일찍 블라디보스톡 시내에 있는 ‘신한비’에 들렀는데 후미진 응달에 스톤핸지처럼 직사각형의 커다란 대리석 바위 세 개가 무겁게 서 있었고 그 옆으로 작은 건물 하나가 딸려 있었다. 이 어머 어마하게 무거운 돌들은 한국에서 공수해 왔다고 한다. 세 개 중 가운데 것만 70톤의 무게였다. 가장 희생이 컸던 신한촌을 기념하는 비석이라서 돌 무게가 마음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십 년째 이곳을 지키고 있다는 리베체슬라브씨를 따라 이곳의 이력을 듣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내부가 외부보다 더 추웠다. 건물 안에서는 오히려 10분도 서 있기가 힘든 지경이었다. 이빨 부딪히는 소리가 부담스러울 정도여서 한조각의 햇볕을 찾아 다시 밖으로 나왔다. 겨울에도 난방을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경비 때문이었다. 한인회장이기도 한 리베체슬라브씨는 중풍에 걸려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분이었는데, 저런 환자의 몸으로 어떻게 여기에서 버틸 수 있었을까? 진지한 사명감에 고무되어, 작은 모금함에 소액 지폐 한 장을 넣으면서 부끄럽고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 세대가 지날 때마다 바쁘게 잊어버리는 역사들을 이런 분들은 즉각 현실로 끌어온다.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우리에게 오늘의 삶을 묻는다.

차에 올라서는 강제 이주 전 지도자급 300명을 바다에 수장시킨 이야기와 안 의사 아들의 친일 행적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였다. 이토 히로부미 아들이 정계에 나왔을 때 돈 몇 푼에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 연명했다던 안중근 의사의 아들. 국가를 위해 초개같이 목숨을 던졌던 안중근과 “사형을 언도받으면 항소하지 마라. 네가 벌했던 이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지 마라. 작은 의에 연연치 말고 큰 뜻으로 죽음을 받아들여라.”라고 말했다던 안 의사의 어머니. 안 의사의 어머니가 구걸 한 밥으로 사식을 넣어주었다던 일화를 생각해보면, 밖에 남은 가족들의 비루함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어린 아이의 눈에 아버지는, 국가는, 무엇이었을까? 역사의 아이러니들은 큰 가지가 꺾여 나갈 때 값없이 떨어뜨려진 이름 없는 꽃들의 낙화, 그 슬픔들의 찌꺼기가 아니었을까.



한유진은

공간 디자이너 문화기획자, 칼럼니스트로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마임이 가미된 음악공연을 연주자들과 공동 선보이는 ‘음악에세이’라는 독창적 프로그램을 기획 진행 총괄 운영해 광주에 첫선을 보였고 광주의 대표적 민간클래식음악회 상징이 된 ‘광장음악회’ 기획 공연 진행을 10년간 이끌어왔다. 오페라를 가족들이 편하게 만나볼 수 있도록 한 ‘그림자극 라 트라비아타’를 대본 공동기획했고 양림동 마을대학 강의와 포럼 진행하는 등 지역의 풀뿌리 문화 저변확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