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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의 홀로코스트 여행기- 下 바르샤바 봉기일에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을 가다
바르샤바 봉기 역사의 현장에서 소환된 5·18의 기억
입력시간 : 2018. 08.27. 00:00


바르샤바 시내. 길가에 봉기군의 깃발(현재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8월 1일, 우리의 바르샤바 첫 여행지는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이었다. 곳곳에 비치된 '바르샤바 탑 10'에도 들어 있는 곳이다. 가족 여행인데, 딱딱한 이런 곳을 선택하도록 동의해 준 식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이제야 한다. 이쯤 되면 '팔푼이'가 되겠지만 할 말은 할 수밖에 없다.

10시에 문을 여는 데, 우리는 서둘러 9시 30분에 도착했다. 그런데 정문 부근엔 경찰차와 군인차가 와있고, 정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삼엄한 분위기는 전혀 느켜지지 않지만, 무슨 일이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사람들 사이로, 문틈 사이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보았다. 군인 몇 명이 집총을 하고 누군가는 꽃을 바치는 조촐한 기념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카메라 기자도 보였다. 잽싸게 인터넷을 뒤졌다. 아! 8월 1일은 '바르샤바 봉기일'이다. 그러면 현재 봉기 기념행사가 벌어지고 있음을 쉽게 알아차렸다. '바르샤바 봉기 제74주년 기념행사' 장소에 한국에서 온 내가 서 있는 것이었다. 이건 무슨 행운이란 말인가? 이를 알아차린 순간부터 나의 촉수는 재빠르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꽤 높으신 분이 와 계셨다. 영화에서 보이는 건장한 경호원 여럿이 주위를 경계했다. 그곳 시민에게 물으니, 부총리라고 답했다. 엄청 미남이었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사람과 수없이 악수하고 사진 찍고 했다. 경호원이 특별히 만류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것을 주선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 아이, 젊은 학생, 봉기 관련자로 생각되는 나이 드신 분 등등 줄줄이 사진을 찍었다. 필자도 가까이 가서 그들의 모습을 핸드폰 사진에 담았다. 어떤 경호원이 시간이 됐으니 가자고 해도 더 몇 사람과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 또 우리 사회가 생각났다. 마침내 그는 떠났다.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바르샤바 봉기 제74주년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왼쪽 안경 쓴 사람이 부총리이다.


우리는 시민들과 함께 줄을 서서 표를 사서 입장을 했다. 정말 많은 폴란드 사람들이 왔다. 우리처럼 방학 숙제하러 부모와 함께 온 초등학생들도 많았다. 나이 드신 분들도 많았다. 외국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전시 공간은 꽤 넓었고, 전시물도 다양했다. 나치 점령하에 있던 1944년에 폴란드의 'Home Army', 즉 '독립군'들이 독립을 되찾고자 봉기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 건립된 박물관이다. 입구에 왜 이 박물관을 지었는지를 'memory and history'라는 제목으로 간단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에 걸맞게 봉기와 투쟁, 그리고 그 주역들의 향후 활동상 및 부역자들의 말로 등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농민, 교사, 간호사, 군인 등등 봉기에 직접 참여했고 측면 지원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기증한 유품 전시실은 눈에 띄었다. 삐꺽삐꺽 소리 나는 당시 인쇄기로 전단지를 인쇄하여 입장객에게 나누어주는 곳도 인상 깊었다. 거의 마지막 전시실인데, 항쟁 중에 독일군에 붙잡혀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번호판을 들고 찍은 사진 속 그들의 얼굴 표정은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것으로 최근에 문화재로 등록된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소장)가 있는데, 카드 속 얼굴 표정은 고문으로 붓고 초췌해진 모습이 많은 편이다. 대비되어 이 글에 소개한 것이다.

봉기 중에 독일군에 붙잡혀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찍은 사진. 웃으며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모차르트의 도시 잘츠부르크

우리는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시내 곳곳을 구경했다. 그날은 그야말로 축제일이었다. 바르샤바는 바로 축제장이었다. 여러 곳에서 기념행사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기념식에 참여한 군인과 학생, 그리고 구경나온 일반 시민과 외국 관광객이 겹쳐 시내는 인산인해였다. 봉기군들이 걸었던 깃발(현재 폴란드 국기)이 나부 켰다. 그들이 찼던 완장을 기념품으로 팔고 있었고, 완장을 구입하여 팔에 차고 다니는 사람들도 제법이었다.

마지막 코스로, 음악에 문외한이지만, 쇼팽 박물관을 갔다. 그때서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숙소에 돌아와 뉴스를 보니, 기념식이 특집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다른 곳에서 기념식을 했다. 부총리가 주재한 기념식도 뉴스에 나왔다. 혹 필자도 나오나 눈이 빠지게 화면을 주시했지만, 난 반대편에 서 있었다. 어찌되었던 간에, 이는 여행객으로 와서 남의 나라 역사의 현장에 서는 행운이었다. 5·18을 겪은 광주 시민으로서, 평생을 매진한 역사학자로서 감회가 클 수밖에 없었다.

봉기 중에 독일군에 붙잡혀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찍은 사진. 웃으며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오스트리아로 옮겼다. 딸이 적극 추천한 곳이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 코스는 물타기 였다. 필자의 희망지와 딸의 희망지를 적절하게 버물린 것이었다. 비엔나로 들어갔다. 국제회의가 열리는 도시인만큼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역사가 오래된 곳인만큼 고풍스러운 건물도 많았다. 저녁에 시청 청사에서 펼쳐지는 '필름 페스티벌'도 구경했다. 명품 거리에는 아랍계 사람들이 많았다. 히잡을 머리에 둘렀지만 명품을 휴대한 모습이 우리에겐 신기했다. 우리도 그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길을 걸었다. '모차르트 하우스'라는 곳도 갔다. 모차르트를 더 많이 알기 위해 우리는 기차를 타고 잘츠부르크로 갔다. 그가 태어난 곳, 그가 커피를 마셨다는 곳 등등 모차르트 관련된 곳을 보았다. 실제 우리도 들어가서 커피를 사서 마셨다. 정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았다. '모차르트 한 사람 가지고 한 도시가 먹고 사는구나' 하는 인상을 가질 정도였다.

비엔나 시청 광장에서 열리고 있는 '필름 페스티벌' 모습.


비엔나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로 건너갔다. 창문너머로 보이는 유럽 평원은 평온하게 보였다. 하루의 시간 여유가 있어서 시내에 나가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일단은 우리 가족이 더위와 여독으로 지쳐 있었고, 이스탄불 자체 분위기가 왠지 뒤숭숭했다. 핸드폰에 시시각각으로 뜨는 외교부의 '외출 삼가' 문자도 우리들 마음을 위축되게 했다. 이스탄불 여행은 다음에 별도로 하자는 약속으로 위안을 삼으며 이내 숙소로 돌아왔다. 마침내 8월 6일, 우리는 10일 만에 인천공항에 되돌아왔다. 강의 시간에, 아니면 지인들 만나면 '홀로코스트'와 '봉기'를 어떻게 설명할까를 생각하며 광주로 향했다. 광주교육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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