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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터) 광주 출신 80년대 군복무자의 비애
입력시간 : 2019. 05.17. 00:00


5·18 광주 항쟁 때다. 필자는 친지 결혼식에 들렀다가 광주 버스 터미널부근에서 공수부대원들의 시민 무차별 폭행을 목격했다(5월19일). 처음에는 군인들이 왜 저러지 했지만 시민을 개패듯 하는 모습에 소스라쳤다. 그들이 휘두른 박달나무 곤봉은 살인무기에 가까웠다.

거리는 금세 피로 물들었고 줄행랑 친 곳이 고향 평동이었다. 다음날인 20일께 시내 사정이 궁금해 전화 걸러나갔다 무장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일도 경험했다. 고향 아주머니들이 군인들을 가로 막고 나서는 억척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떠 올리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80년 5월을 겪은 광주 사람이라면 이 정도 기억은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을거다. 그러나 더 큰 고민은 군대서 경험했다. 나중에 보니 광주 출신 80년대 군번들의 일반적 고민이었다. 필자는 이듬해 5월 군에 입대했다. 5·18 말만 나와도 잡혀가던 시절이다. 광주 출신이 군에 입대하면 괜히 주눅이 들었다. “너 광주서 데모깨나 했지?”하며 구타와 폭력이 더해질만큼 한스러웠다.

광주 시민을 개패듯 하던 공수부대원들과 똑같은 군복을 입고 있는 자신을 보면 영락없는 계엄군이었다. 사관후보생이었던 필자는 광주 인근의 상무대 연병장을 뒹굴며 뜨거운 한 여름을 보냈다. 연병장의 열기를 버티기 힘들었지만 “살인마 전두환”에 복종하는 것 아닌가 하는 혼란스러움과도 싸워야 했다. 광주출신 80년대 군 복무자가 겪어야 했던 말 못할 속앓이였던 셈이다.

더 두려운 것은 필자가 근무한 부대가 광주 데모를 진압했다는 헛소문이었다. 수상한 시절이라 소문은 그럴 듯 했다. 야간 훈련 때면 광주 외곽을 소리 없이 통과하고 정찰하는가 하면 백일 사격장, 무등산 유격훈련 등 광주시 인근을 누비면서 의심은 더욱 커졌다. 자칫 필자가 알고있는 이들과 맞닥뜨리는 것 아닌가 하는 가위눌림에 시달리곤 했다.

군 생활 동안 광주는 금기어였다. 광주라는 말만 나오면 마치 죄인인 듯 눈만 껌벅거려야 했다.

국방 의무마저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던 광주 출신 80년대 청춘들에게 5·18은 벗어날 수 없는 멍에였다. 그 멍에를 졌던 80년대 광주 출신 청춘들 머리에 어느새 하얗게 눈이 내렸다. 벌써 서른아홉해가 지났다.

나윤수 칼럼니스트 nys8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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