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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별기획-'대한독립 만세' 현장을 찾아서 6 영암, 영암읍 오일시장·구림기념탑
구국 항일 운동 본고장…일제 맞서 만세운동 ‘활활’
일제 수탈 극심한 곳
광주 만세 운동 영향
지역 청년 중심 계획
구림서 1천여명 집결
만세외치며 읍내 진출
입력시간 : 2019. 05.28. 00:00


구림 3·1운동 기념탑. 영암문화원 제공
1919년 4월 10일 1천여명의 영암 주민들은 영암읍과 구림리 두곳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사진은 현재의 영암오일장 모습.


영암 3·1 만세운동은 이후 1932년 일어난 형제봉 만세사건과 함께 영암의 대표적 항일투쟁으로 꼽히고 있다. 사진 속 산봉우리가 형제봉의 모습. 영암문화원 제공


영암군은 지난 3월 1일 영암공원과 영암읍 시가지에서 군민 등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3·1운동 제100주년 기념식과 만세운동 등 다양한 재현행사를 가졌다.


영암은 예로부터 호남 교통의 요지이자 물자가 풍부하게 났던 곳이라 일제의 주요 물자 수탈 지역으로 꼽혔다.

일제 강점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이뤄진 경제적 침략은 일찍이 발달했던 의병활동과 항일운동의 불씨를 당기는데 주요했던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1919년 전국을 휩쓴 3·1 만세운동의 열기도 영암을 지나칠 수 없었다. 영암지역 3·1만세운동은 일제의 수탈에 고통받던 지역민들과 광주에서 벌어진 3·1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은 지역 인사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두 번의 실패 끝 거사 준비

1919년 3월 초 서울에서의 3·1운동 소식이 영암군에도 전해지자 지역의 뜻있는 청년들이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영암 3·1만세운동은 당시 영암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조극환을 비롯해 영암읍 구림리의 박규상, 최한오 등 지역 청년들의 주도로 시작됐다.

조극환은 1919년 3월11일 장날에 맞춰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먼저 눈치를 채고 감시를 강화하는 바람에 이 시도는 실패하게 된다. 이어 3월20일에도 밤중에 산에 올라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부르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나 그 규모가 작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조극환이 벌인 간헐적인 시위로 인해 영암군은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고 있었으나, 박규상 등 지역 인사들이 조극환의 시도를 눈치 채고 연락해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함께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박규상을 비롯한 지역 청년들은 구림리의 간죽정에 모여 거사준비를 위한 조직도와 담당 부서를 짜는 등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만세시위 당시 배포할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지 못해 인쇄 문제로 늦어지고 있었다.

이에 4월4일 조극환이 독립선언문과 독립운동가를 가지고 구림으로 찾아와 이들과 합류하고 본격적인 만세운동의 준비에 들어가게 된다. 4월8일 밤 군서면사무소에서 독립선언서 500여장과 독립운동가 100장, 태극기 등을 인쇄한 이들은 돌아오는 장날인 10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시위 장소로는 영암 읍내와 구림리 두 곳을 정해 동시에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했다.



◆영암, 구림 동시에 ‘독립만세’

거사 전날 박규상은 구림보통학교 학생들과 지역민들에게 거사진행상황을 전하고 정상조의 나팔소리를 만세운동 시작의 신호로 정했다. 거사 당일 아침 9시 나팔소리가 울리자 영암읍과 구림리에서 학생들과 지역민들이 동시에 모여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나팔소리와 함께 영암읍의 회사정 광장에는 영암보통학교 학생들과 읍민들이 모여들었고, 박규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일제히 태극기가 펄럭였다. 구림보통학교에서 수업을 듣던 학생들도 일본인 선생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거리로 나와 시위는 최고조에 달했다. 모여든 지역민들은 독립운동가를 열창하며 영암 읍내 중심가로 향했다. 장날에 맞춰 일어난 시위는 마침 장을 보고 있던 지역민들의 합류로 세가 불어나 1천여명의 지역민들이 모이기에 이르렀다.

같은 시각 최기준과 조병식 등 지역 인사들은 구림 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학생들과 지역민들을 불러 모으고 만세행진을 지휘했다. 이곳에서 모인 지역민들은 약 300여명으로 관내를 누비며 만세를 부르짖었다.

시위대는 영암읍을 향하던 중 출동한 무장헌병들과 경찰에 의해 해산됐으나, 다시 회사정으로 돌아온 일부 지역민들에 의해 산발적으로 계속됐다. 정상조는 시위 내내 나팔을 불면서 순사들과 대치하며 한참동안 숨바꼭질식의 시위가 진행됐다. 오후 5시께 정상조가 일본 헌병들에 체포됨에 따라 이날의 시위가 끝났다.

이날 시위로 인해 군중과 주동자들 약 100여명이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들은 장흥지청으로 송치돼 재판을 받았으며 이중 조극환은 9월17일 주동자중 가장 무거운 징역 2년형을 받았다. 박규상은 수형생활 도중 병을 얻어 1년 만에 병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구림으로 돌아오던 중 서호강을 건너다 “구림이 보이느냐”는 말을 남기고 순국했다. 후에 박규상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조극환·정학순·조병식·김재홍·최기준 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그날의 함성, 기념탑으로

영암에서 일어났던 3·1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지역민들과 청년들을 주축으로 기념탑의 건립 논의가 오갔다.

이들은 주민들의 성금과 군비 등을 지원받아 당시 만세시위가 시작된 회사정 인근의 영암도기박물관 내에 탑을 세웠다. 건립된 탑은 높이 10m, 너비 6m이며, 부지 면적은 100㎡다. 탑은 세 개의 긴 탑을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세운 주탑의 모양새가 특징이며, 주탑의 상부에 태극무늬를 조각해 만세운동을 기렸다.

기단의 앞면과 뒷면에는 만세 시위의 모습을 조각했고, 좌우 옆면에는 당시 만세운동에 대해 최승호가 지은 헌시 ‘구림 찬가’가 새겨져 있다. 2001년 4월13일 제막식을 가진 기념탑은 2003년 1월에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영암문화원 김한남 원장은 “영암 3·1 만세운동은 이후 1932년 일어난 형제봉 만세사건과 함께 영암의 대표적 항일투쟁으로 꼽히고 있다”며 “일제의 잔혹한 압박 끝에 태극기를 들고 일어선 지역민들의 뜻은 영암이 구국 항일 운동의 본고장으로 알려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김옥경·도철원·한경국·이영주·오세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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