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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경의 월드뮤직- 기타의 신 파코 데 루치아
악보·화음도 없이 감각으로 신의 경지에 이른 뮤지션
플라멩코에 모든 음악 장르를 포용해 엄청난 예술로 승화시키며 플라멩코의 전설이 됐다
“한번도 음악적 정체성을 잃어 본 적 없다 그렇게 된다면 스스로도 살 수 없을 테니까”
“사람들이 날 보고 음악을 배운다지만 그들에게 음악을 배우는 것은 나였다”
입력시간 : 2019. 06.07. 00:00


음악을 좀 들어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의 연주는 인간의 연주가 아니라고 추앙한다. 기타의 신이라고. 기타의 신들이 많아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기타 중에서도 특히 플라멩코 기타의 신이라고.

플라멩코 음악은 그 역사적 기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악보 없이 전해져 오는 음악을 바탕으로 춤과 노래가 곁들어지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집시들의 예술이라는 정도.

안달루시아 지방은 유럽 대륙의 서남단에 위치해 있어 북쪽은 피레네 산맥에 의해 격리돼 유럽 영향없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문화가 발달해 왔다. 플라멩코 기타의 경우 19세기 전반에 체계적인 형식화가 되고 20세기 초에 완전한 그 틀을 갖추게 되었다. 플라멩코의 어원은 농부라는 플라와 노래라는 멩구가 결합해서 플라멩코가 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플라멩코 기타의 신, 파코 데 루치아가 처음부터 플라멩코 연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던 것은 아니었다.

파코 데 루치아는 1947년 12월 21일 스페인 카디즈 지방의 먼 북쪽 알헤시아라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플라멩코 기타리스트였던 아버지 안토니오 산체스 페치노와 포르투갈 출신 어머니 루시아 고메즈 사이에서 다섯 아이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리고 파코의 형 페페 드 루치아와 플라멩코 기타리스트였던 라몬 드 알레시라 역시 플라멩코가 낳은 음악가다.

알디메올라와 파코의 연주 무대


파코 데 루치아는 기타 연주를 시작하면서 음악가로서의 영광을 그의 어머니 루치아에게 돌리고 싶어했고 그의 무대 이름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루치아의 아들, 파코, 파코 데 루치아’ 라고.

그의 아버지 안토니오는 사촌에게 기타 레슨을 받았다. 기타리스트였던 아버지의 사촌은 1920년대에 알헤시아라에 도착해 그곳에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아버지 안토니오는 사촌에게 어린 파코를 소개했는데 그 재능을 알아본 안토니오의 사촌은 파코가 5살의 나이에 날마다 하루 12시간씩 혹독한 훈육에 돌입했다. 그리고 후에 파코는 프로 음악인으로 성장한 후 이런 힘든 연습이 있어서 자신이 잘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2012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아이들이 말을 배우듯이 기타를 배웠다.”

플라멩코 기타리스트이자 자서전 작가였던 돈 포호렌과 음반 프로듀서였던 호세 토레그로사는 파코와 아버지의 관계를 울프강 모짜르트와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짜르트에 비교하면서 언급하기를 아들을 세계적 수준의 음악인이라는 틀에 넣고 조형하듯이 키워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파코가 실제로 세계적 수준의 음악인으로 성공했을 때에도 이 같은 언급을 멈추지 않았다.

젊은시절 파코


파코의 나이 열네살에 그의 형 페페와 함께 ‘알헤시아라의 아이들’이라는 첫 음반을 녹음하게 된다. 1960년대 초에는 호세 그레코의 플라멩코 군무팀과 함께 어린 나이에 반주자로 발탁돼 투어를 시작했다. 1963년 파코의 나이 15살에 그의 멘토이자 후일 절친한 친구가 되는 사비카스와 마리오 에스쿠데로와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파코에게 자신의 작품을 작곡해보라는 권유를 듣게 되고 가슴안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음악으로 표현할 것 인지에 대한 진지한 충고를 접하게 된다.

파코의 초기 시절에는 전통적인 플라멩코 연주를 주로 했고 앨범을 냈다. 그리고 1967년 파코의 첫 데뷔 앨범인 ‘파코 데 루치아의 환상적인 기타’(La fabulosa guitarra de Paco de Lucia, 라 파불로사 기타라 데 파코 데 루치아)를 발표한다. 후에 음악 애호가들은 이 음반에 찬사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1967년 베를린 재즈 페스티발에 파코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탑 재즈 연주가인 게르하르트 클린겐스타인은 파코에 완전 심취하여 그의 인생 전반에 가장 불꽃 튀는 영향을 준 음악인이 바로 파코였다고 밝혔다.

파코는 사실 악보를 볼 줄 몰랐다. 그랬기에 재즈나 클래식 기타 연주를 오직 자신의 감각에 의존해 이전에는 전혀 구현 되지 않았던 음악, 오직 그 자신만의 목소리와 극명한 스타일로 재해석된 플라멩코 연주가 탄생했다.

그의 이런 혁신적인 기타 연주로 누구나 연주하고 싶어하는 유명한 음악홀에서 연주를 시작했으며 처음으로 BBC에 출연 했을 때에는 “이 엄청나고도 전도 유망한 젊은 음악가가 그의 음악적인 첫 발걸음을 이 BBC에 뗀 역사적인 날” 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자연적으로 제한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랬기 때문에 그는 인간의 목소리 보다는 악기를 통해 더 넓은 음악세계를 구축하는 것에 집중했다. 세계 여기저기 투어를 다니면서 얻은 그의 유명세는 그를 ‘누에보 플라멩코’라는 수식어를 붙게 했다. 새로운 플라멩코 연주자, 파코 데 루치아가 된 것이다.

후에 미국 기타의 거장 알 디 메올라와 함께 앨범 우아한 집시에 수록된 ‘지중해 태양의 춤’이라는 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수많은 음악팬들과 전통적인 플라멩코 지지자들은 그 신들린 연주에 대해 대놓고 인상을 찌부리고 난색을 표현했다. 그런 냉소적이고 적대적인 반응에 대해 알 디 메올라는 이렇게 말했다. “파코는 플라멩코를 떠난 것이 아니고 그 경계를 넓힌 것”이라고.

파코의 음악을 정말 간결 명료하게 잘 설명해준 평가가 아닐 수 없었다. 기원도 역사도 모르는 그 지역에 살던 집시들로부터 시작해 사랑 받고 있는 플라멩코를 다양한 음악 장르와 접목해 플라멩코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모든 음악 장르를 포용하며 플라멩코라는 음악적 색채를 더해 엄청난 예술로 승화됨을 보여줌으로써 플라멩코의 전설이 된 것이다.

허나 사람들은 그가 다른 음악들 때문에 그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을 모두 잃어버렸다며 안타까워했고 더러는 걱정했으며 더러는 그를 버린이도 있었다. 이런 수많은 비난과 걱정을 놓고 파코는 인터뷰에서 밝혔다.

“나는 한번도 나의 음악적 정체성을 잃어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다면 나 스스로도 살 수 없을 테니까…. 내가 시도했던 것들은 전통과 손을 잡고 플라멩코에 새로운 것들을 접목하기 위해 낑낑대고 흠집을 내고 헤매기도 하며 탐색을 했던 것이었을 뿐.”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겸손했다.

“다른 사람들이 날 보고 음악을 배운다고 말하지만, 나야말로 언제나 그들에게 음악을 배우는 것은 나였다. 한번도 음악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 없는 나는 화음을 공부하는 것이 불가능 했고 나는 음악적인 규칙이나 연주를 언제나 다른 사람들로 배워야 했다.”

그의 이 거대한 겸손함과 정식 음악 교육이 줄 수 없었던 그 자유 분방함은 그를 전통에서 걸어나와 혁신을 더할 수 있는 음악을 창조해 낼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미 거장이라 불리고 있는 수많은 음악인들이 파코에게 영향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2014년 2월 25일 멕시코의 퀸타나 루의 한 해변에서 아들과 축구를 했다. 그러고는 아내에게 자신을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의 목구멍으로 뭔가 이상한 서늘함이 느껴진다고…” 그는 바로 도시 유카탄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 스스로 응급실에 걸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 였지만 이내 의식을 잃었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고향, 안달루시아에 묻혔다. 그리고 그해에 파코 데 루치아는 앨범 깐시온 안달루시아로 라틴 그레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음반상을 수상하였다.

요새 날씨를 보면 하루도 예측이 가능한 날이 없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엄청난 비보가 쏟아진다. 기쁜 날보다는 무사히 살아냄을 기뻐해야 할 것 같은 날들의 연속이다. 어느샌가 행방을 알길 없는 봄인가 여름인가 하는 이 계절 가운데 마음이 눅눅한 어느날, 파코 데 루치아를 들어보자. 우리 인생에 베리에이션(변주)를 꿈꾸며.



김세경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회의를 전공하고 대학에서 문화강의 교수로 활동했다. 월드뮤직 애호가이자 전문가로 지역방송에서 대중에게 월드뮤직을 소개하는 방송인으로 활동했다. 호주에서 아트앤 인테리어 데코레이션 공부를 한후 지역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며 신진작가들과 외국인 화가들을 후원하는 전시를 기획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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