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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차별과 폭력에 오염된 현실 고발
입력 : 2019년 06월 21일(금) 00:00


철의 시대

J.M. 쿳시 지음│왕은철 옮김│문학동네│1만3천원

새책 ‘철의 시대’는 암으로 죽어가는 백인 여성의 눈을 통해 인종차별과 폭력으로 얼룩진 남아프리카의 비극을 여러 층위에서 사유하는 쿳시의 대표작이다.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국가 주도의 야만적인 인종차별 정책을 심금을 울리는 문장으로 통렬하게 고발한다.

쿳시는 소설과 에세이,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쳐온 다재다능한 작가다. 남아프리카 문학의 거장 네이딘 고디머는 그를 가리켜 “종달새처럼 솟구쳐 독수리처럼 내려다보는 상상력을 지닌 작가”라고 격찬하기도 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영어권 소설가 중 두말할 필요 없이 가장 유명하며 수상 이력이 많은 소설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문학상과 더불어 영연방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부커상(맨부커상의 전신)을 최초로 두 차례 수상했고, 2003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철의 시대’는 쿳시의 소설 중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대한 분노가 가장 인상적이고도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남아프리카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던 시절, 퇴직한 고전문학 교수인 커런 부인은 백인으로서 혜택받은 삶을 살아왔다. 불치의 암을 선고받은 생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인종차별정책의 날선 공포와 마주한다.

그녀의 침실 발코니에서 흑인 거주지역인 케이프 플래츠에서 치솟는 연기가 보이고, 그녀가 고용한 흑인 가정부 플로렌스의 아들 베키가 죽임을 당하며, 집안에 들인 베키의 친구 존은 경찰의 총격을 받고 숨진다.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지는 그녀 곁에는 그녀 집에 마음대로 들어와 살고 있는 노숙자 퍼케일과 그가 데리고 다니는 개 한 마리뿐이다.

커런 부인이 멀리 미국으로 이주해 사는 하나뿐인 딸에게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알리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된 이 소설에는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악랄한 체제에 일조한 백인의 수치심이 가득하다. 커런 부인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수치심에는 한계가 없는 것 같다며 절망에 빠져 괴로워한다.

쿳시는 백인으로서 사회에서 지니는 자신의 기득권을 뼈저리게 의식하는 작가다. 그는 자신과 다른 위치성에서 살아가는 타자들을 함부로 재현하는 일은 그들의 시선을 전유하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작품을 통해 꾸준히 드러내왔다.

특히 작품에 나오는 약자들, 즉 퍼케일, 존, 플로렌스, 베키, 타바니 등과 같은 흑인들에 초점을 맞춰 그들의 실존적 삶을 재현하려 하는 대신, 가해자인 백인의 내면을 해부하고 그들의 모순을 지긋이 응시한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는 흑인들의 경험을 서사의 중심에 놓고 그들의 삶을 재현하고 대변하는 것이 자칫 허위나 값싼 감상이 될 수 있음을 예리하게 의식하고 있다.

암으로 죽어가는 백인 여성의 눈을 통해 인종 차별과 폭력에 오염된 현실을 다시한번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김옥경기자 okkim@sr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