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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금덕 할머니 인터뷰-“죽기 전에 아베한테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는 들어야”
입력 : 2019년 08월 13일(화) 18:42


초등학교 6년을 내리 급장을 할 정도로 총명했던 양금덕 어린이는 공부시켜준다는 교장과 순사의 말에 속아 일본 노동자로 끌려가 인생이 고난이 됐다. 양 할머니는 광복절을 앞두고 일본의 사죄를 다시 한번 촉구하고 나섰다. 임정옥기자
정신근로대 양금덕 할머니의 광복절 소회

일본 아베정권이 2차 대전 중 일본이 저지른 한국민의 강제동원과 노역에 대한 일본기업의 배상책임을 묻는 한국 법원의 판단에 경제보복으로 맞서고 있다.

지난해 11월 한국대법원은 1940년대 강제징용당한이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 소송의 원고로 참여한 양금덕(90) 할머니를 만나 소송에 관한 이야기와 해방 74주년을 맞는 소회를 들어본다.<편집자 주>



“사람 같으면 인자라도

미안하다고 사과할 건 해야하는데

저렇게 뻔뻔하게 나가니 천불이 난다“

“학생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의 듣는 모습을 보면

잘 살아남았구나 싶어

자라나는 세대들이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알아야제”

“사람 같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제. 인자라도 미안하다고 사과할 건 해야하는데 저렇게 뻔뻔하게 나가니 천불이 난다. 아베 저거는 벼락 맞을 인간이여.”

양금덕 할머니는 최근 아베정권의 경제보복 행태에 ‘양심도 없는 인간’들이라며 분노를 금치 못한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어 안타깝다. “젊은 남자들은 다 병들고 죽었어. 모다 죽어가. 살아생전에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지금이야 국민들이 근로정신대의 성격도 알고 억울함을 이해도 해주지만 외롭고 서러운 길이었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죄제, 나 혼자 간 것도 아니고 누구를 탓할 것이여”

공부 시켜주겠다는 말에 혹해서 따라 나선 것이 총명했던 한 아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일본인의 천대보다 더 지독한 사람들의 편견...

“내가 살아온 일은 소설 10권으로도 부족하다”는 할머니.

기자가 할머니를 만난 날은 마침 광주시가 전국 광역자치단체 최초로 일본 잔재에 대해 단죄비를 세우는 날이었다.

양금덕 할머니는 “그래도 오래 사니 이런 날도 오고, 이제는 사람들이 우리 같은 사람들에 대해 이해도 해주니 살아남은 보람이 있다”고 소회를 털어놓는다.



감언이설과 협박 그리고 편견



일제강점기인 1944년 초등학교 6학년 양금덕 어린이는 어느 날 교장이 칼 찬 순사와 함께 들어와 ‘이 분 따라 일본으로 가면 중학교도 보내주고 공부도 시켜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근로정신대를 자원했다.

여자도 가르쳐야 한다는 깨어있는 아버지 덕에 나주초등학교를 다니던 양금덕 어린이는 6학년까지 급장(지금의 학생회장)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총명하고 영민했다. 그 때 배운 일본어와 한자를 지금도 자유자재로 쓸 정도로 그녀의 기억력과 언어능력은 빼어나다.

‘일본이 왜 조선인을 공부시켜주겠느냐’는 부모님 반대에 철회를 요청했더니 부모를 잡아가겠단다. 부모님 잡혀갈까봐, 혹여 공부라도 시켜줄까봐 부모님 몰래 도망치듯 일본행 기차를 탔다. 1944년 6월의 일이다.

어린 청소년들에게 혹독한 공장일은 버거웠다.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일본인들이 먹다 버린 밥을 주워 먹기도 했다. 그럴때면 일인들이 뺏어 발로 짓밟아버리는 등 차별과 천대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월급은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적금을 해뒀다 나중에 찾아가란다. 해방이 되자 주소가 있으니 보내줄테니 걱정말란다.

해방 석달 만에 고향에 돌아왔으나 온다는 돈은 오지 않았고 이번에는 동네사람들의 손가락질이 이어졌다. ‘일본서 돈 많이 벌었겠다’는 수근거림은 위안부아니냐는 손가락질이었다. 어찌어찌 좋은 인연을 만났으나 남편이 위안부를 들먹거리며 결혼 몇 년만에 집을 나가 10년만에 아이 셋을 데리고 돌아왔다. 과도한 술로 그녀 나이 34세에 남편을 떠나보내야했다.

가진 것도 없이 여자 몸으로 아이들 키워낸 일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으랴. 시장통 장사를 하면서 어찌어찌 아이들을 건사해낼 수 있었다.

“제일 환장 헐 일은 애들한테 ‘위안부 자식’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이여. 버선처럼 뒤집어 보일수도 없고 평생을 따라다녔제”라고 털어놓는다.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공부해보겠다고 따라 나선 것이 무슨 죄냐”며 “나는 근로정신대를 하고도 이렇게 모진 세월을 살았는데 위안부로 끌려간 여자들은 오죽했겠냐”고 덧붙인다.

이어 박근혜 전대통령을 모질게 비난한다.“그 x는 징역을 살아도 싸. 지 애비는 그래도 좋은 일이라도 했는데 어떻게 위안부 할머니들한테 말 한마디 없이 그딴 짓을 할 수가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역사강의 할 때 가장 행복



“그래도 이번에는 대통령이 절대 안질란다고 헌께 힘이 난다”

최근 일본 경제 보복에 대통령과 정부가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나선 것에 그래도 일말의 위로를 받았다는 말이다. 또 국민들도 이제는 정신 차리고 불매운동을 하고 근로정신대와 위안부 피해자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평생의 서러움이 풀리는 것 같다.

‘돈이야 있으면 좋고 없으면 어쩔 수 없지만 정신은 그것이 아니’라는 할머니.

얼기설기 덧 이은, 계단식 방과 부엌으로 이뤄진 서구 양1동 할머니의 고단한 집이 불편하지 않은 이유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때는 참 환장하겄더만 요즘 어린 학생들이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의를 듣는 모습을 보면 그래도 잘 살아남았구나 싶어. 자라나는 세대들이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알아야제”

소송과 진실 찾기

양 할머니는 대일투쟁에 일찍부터 나섰다.

초창기인 1990년대 중반부터 활동했다. 일본 정부와 기업에 항의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것만도 36회에 달한다.

1992년 부산 종군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관부재판(關釜裁判)부터 참여했다. 94년 합류한 이후 끊임없이 일본의 책임을 촉구해오고 있다.

피해자들이 처음 배상 청구에 나서던 1990년대만 해도 우리사회 시민사회나 정치권 등에서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과 시민단체 등의 도움으로 일본에서의 법정투쟁이 전개됐다. 1999년 일본에서 첫 소송이 시작됐다. 2008년 일본에서의 소송은 일본 기업 완승으로 끝난다.

이듬해 광주에서 근로정신대할머니들의 재판을 지원하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과 함께하는 시민모임(상임대표 이국언)이 만들어졌다. 1990년대부터 이들을 지원하던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유족회(회장 이금주) 등이 힘이됐다. 2012년 광주지방법원에 강제징용재판을 국내에서 다시 시작해 마침내 지난해 최종판결을 얻어냈다. 지금 2차 3차로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

조덕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