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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서거 10주기 무등일보 단독인터뷰“다시 태어나도 이 길 가겠다”…DJ 최측근 권노갑 김대중기념사업회 이사장
무등초대석

1963년 국회 비서로 등록 이후 50여년 DJ 보좌
서거 이후에도 매주 화요일 현충원 찾아 DJ정신 계승
DJ는 ‘용서와 화해’를 국민들에게 유산으로 남겨
“현 국제정세를 보면 그분의 경륜과 철학이 절대적으로 필요”
동교동계는 정치적 모임이 아니라 DJ를 따르던 사람들
“DJ 정신 계승 발전시킬 후배 정치인 보이지 않아”
입력시간 : 2019. 08.15. 16:20


권노갑 - 5
권노갑 김대중기념사업회 이사장의 이름 앞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최측근’, ‘동교동계 좌장’, ‘DJ 그림자’, ‘DJ의 영원한 비서실장’ 등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권 이사장은 단연 김 전 대통령과 각별한 관계다. 그가 결혼할 당시 청첩장에 ‘김대중 동생 권노갑 군’이라고 쓸 정도. 그는 1963년 김 전 대통령의 비서로 국회에 등록된 이후 서거 전까지 47년을 모셨다. 서거 이후에도 매주 화요일마다 현충원의 DJ 묘지를 찾는 등 김 전 대통령의 정신 계승에 앞장서고 있다.

무등일보는 김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8월18일)를 맞아 사후에도 ‘비서실장 역할’을 하고 있는 권 이사장을 만나 DJ의 정치철학과 동교동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 9일 오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5층에서 했다.

- DJ와의 인연은 언제 시작됐나.

▲중학교 1학년 14살 때부터다. 목포상업학교에 들어갔는데 DJ는 중학교 5학년으로 4년 선배였다. 그 분의 명성은 조선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고 일본인 학생들을 포함해서 가장 훌륭한 선배라고 여겨 모든 뒷바라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됐다.

-DJ의 어떤 부분이 훌륭했나.

▲명연설을 했고 성적도 1등이었다. 조선과 일본 학생 모두 DJ에게 동경심을 갖고 있었다.

-서거 10주기를 맞는 소감은.

▲어려운 국내외 상황에서 DJ가 더욱 그리워지고 그 분의 지혜와 정치적 경륜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DJ가 살아있다면 현 국제정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라고 조언했을까.

▲DJ의 지혜와 철학, 경륜을 후배 정치인들이 배우고 실천으로 옮겼으면 한다. DJ가 했던 외교·통일정책을 해 나갔으면 좋겠다.

-DJ 이후 호남정치 구심점이 사라지고 호남정치가 변방으로 밀려났다. ‘뉴 DJ’ ‘새로운 호남정치 지도자’가 나오지 않고 있는데.

▲DJ의 정치를 실천·계승·발전시키려는 사람이 나오지 않고 있다. 안타깝다.

-안 나오는 이유는.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 없이 노력하고,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DJ 발자취에 대해 많이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DJ 연설문을 읽어라. 거기에 DJ의 모든 철학이 담겼다. 이런 노력이 부족한 것 같다.

-오랫동안 DJ의 최측근이었다. 언제부터이고 유지 비결은 뭐였나.

▲같이 정치를 시작한 것은 1961년이고 국회 등록 비서로 일한 것은 1963년부터다. 50여 년 동안 모셨다. 정직했고 불리하더라도 옳은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부분들을 지켰다. 그래서 나와 DJ는 정치적 관계를 뛰어 넘을 수 있었다.

-DJ를 모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내가) 한보사건으로 불행에 처해 있을 때이다. 그때 내가 모시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박지원 의원과 동교동계는 어떻게 규정되나. 언제부터인지 동교동계와 박지원 의원이 경쟁관계였다.

▲동교동계와 ‘박지원’은 역할이 달랐다. 박 의원은 일을 잘 하고, 치밀하고 성실했다. 새벽에 와서 (DJ에게) 보고하고 저녁에 기자들과 어울리며 기자들 생각을 DJ에게 알히고, 기자들에게 DJ 의중을 전달했다. 이런 일을 우리 비서진 중에서 가장 잘 했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DJ가 좋아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동교동계가 갖는 의미는.

▲동교동계는 정치적 모임이 아니다. 동교동에 사신 DJ를 모신 비서들과 따르던 사람들을 가리켜서 자연스럽게 불러진 말이다. 나는 동교동계보다 ‘동교동 사람들’이란 말을 더 좋아한다. 동교동 사람들은 DJ를 따라 민주주의·인권·평화를 위해 노력했고, 많은 탄압을 받았지만 배신하지 않고 단결했다. 계속해서 그분의 뜻과 정신을 이어갈 것이다.

-5번의 죽음, 망명, 감금 등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때 심정은.

▲그때 마다 나는 돌아가시는 게 아닌가 하는 절망감과 동시에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DJ가 돌아가시면 이 나라의 희망이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끝내 대통령이 돼서 나라와 국민에게 희망을 줬다.

-DJ를 보좌하면서 고초도 겪으셨을 텐데.

▲중앙정보부에서 물고문 당하고, 5·18 때는 남영동에서 물고문 당했다. 군사정권은 나에게 김 대통령의 여자 관계, 자금 관계, 군 관계에 대해 말하라고 했다.

-군사정권에서 회유책도 썼다던데.

▲거금 3천만원(지금으로 환산하면 30억원 정도)을 준다며 DJ와 손만 끊으라고 했다.

- 대통령 직선제로 바뀐 뒤 처음 치러진 1987년 대선에서 패배해 군사정권이 이어졌다. 패인은.

▲단일화 실패 때문이다. DJ는 ‘내가 이번에 양보했더라면…’라고 후회했다.

-단일화가 안된 이유는.

▲DJ를 지지하는 재야인사들이 신민당에 입당하려는데, 당시 김영삼 총재가 이들을 개별 심사하자고 해서 틀어졌다. 그들은 ‘박정희에 대해 선명성을 보인 그룹이 누구냐, 심사를 받아할 그룹은 신민당이다’라며 입당계획을 철회했다. 결국 그들은 입당하지 않고 김 대통령과 함께 했다.

-김영삼 총재가 재야인사 심사를 거론하는 이유는.

▲경선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판단랬던 것 같다. (경선 승리는) 지금처럼 수십만 표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었다. 200~ 500표로 당락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재야인사들이 대거 입당하면 DJ가 경선에서 유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DJ 대선캠프 분위기는 어땠나.

▲‘4자 필승론’이 팽배했다. 경상도 사람 두명(김영삼·노태우), JP(김종필)는 충청, 우리는 호남이었다. 호남에서 전폭적으로 지지 받고 나아가 경기·강원도 등 전국에 산재해 있는 호남향우들이 다 찍으면 우리가 유리할 것으로 생각했다. 캠프에서 이런 관측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 후 우여곡절을 여러번 겪었다가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느낌은.

▲그때 내가 불행히도 한보사태 여파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병원에서 당선 확정 방송을 듣고 순간적으로 울음이 터저 나왔다. 드디어 해냈구나하는 안도감과 함께 쌓였던 울분과 슬픔이 흘러나왔다.

- 대선 후 좋은 자리에 한번도 가지 않았는데.

▲대선 과정에서 동교동계 인사들이 DJ가 대통령이 돼도 임명직을 맡지 않기로 각서를 섰다. 그리고 언론에 발표했다. 그래서 선출직만 했다.


- 아쉽지 않았나.

▲당시 DJ가 당선되면 동교동계 비서들이 한 자리 차지할 것이라는 여론이 많았다. 이 지배적 여론을 불식하기 위해 우리 비서들은 절대 임명직은 하지 않겠다고 각서를 썼다. 그 이후 여론이 많이 좋아졌다. 당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DJ가 국민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보다 용서와 화해를 실천했고 유산으로 남겼다. DJ는 자신을 탄압하고 죽이려했고 비방했던 모든 사람을 용서했고 이를 통해 국민화합을 이뤘다. 이런 용서와 화해정신에 기반해서 민족의 화해협력과 평화통일 기반을 구축하고 미래세대가 평화통일의 희망을 갖게 했다.

-김대중 정부의 업적을 꼽으면.

▲민주주의·인권·평화의 국가, IT정보화 세계 최선두 국가, 세계 10위권 경제국가, 선진복지국가, 한류문화와 품격 있는 문화국가, 튼튼한 안보와 자주적인 외교국가 등을 통해 우리 국민을 잘살게 하고 우리나라의 세계적 위상을 높여 놓았다.

-서거 이후 매주 화요일마다 현충원에 간다. 그 이유는.

▲DJ를 추모하는 마음 만이 아니라 그 분의 뜻과 정신을 기리고 계속 이어가자는 다짐의 의미로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

-DJ는 홍어를 얼마나 좋아했나?

▲삭히지 않은 홍어를 즐겨 드셨다. 조기·복 매운탕, 비프스테이크 등 싫어하는 음식은 없었다. DJ가 홍어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러 사람이 홍어를 보내와 동교동 냉장고에는 항상 홍어가 있었다.

-DJ가 광주·전남을 방문하면 즐겨 찾은 식당이 있었는가.

▲특별한 집은 없었다. 이집 저집 나눠서 갔다. 광주에서 어느 한 집만 ?다고 하면 안되니까.

-한 사람을 50년 모신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후회하지 않나.

▲다시 태어나도 이길을 가겠다. DJ와 나는 묘하게 같았다. 내가 이야기 하면 받아주고, 나한테 꾸지람을 한 일도 없었다.

-광주·전남 지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광주·전남은 DJ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광주·전남은 DJ를 잉태했고 위대한 정치인으로 성장하게 했고, 위기 때마다 굳건하게 지켜줬다. DJ도 ‘광주·전남이 없으면 김대중도 없다’고 항상 말씀했다. 지금도 DJ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광주·전남이 아니라 모든 호남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권노갑 이사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 50여년 모신 최측근, 그림자

권노갑 김대중기념사업회 이사장은 1930년 2월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전남 신안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뒤 1932년부터 목포에서 성장했다.

해방 직후 부터 목포상업학교 선배인 김대중 전 대통령(DJ)을 돕기 시작했고 그의 참모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의 조직과 자금책을 맡으면서 ‘김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평생 그를 지켰다.

권 이사장은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류돼 보안사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이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 미국으로 망명하자 김 전 대통령을 대신해 민주화추진협의회 상임운영위원을 맡았고 동교동계 좌장 역할을 하면서 DJ의 빈자리를 지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 공천을 받아 목포에서 당선된 이후 3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한보특혜 대출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5년형이 확정돼 수감되면서 김 전 대통령의 당선 소식을 병원에서 듣게 된다.

‘김대중 정부’ 초기에는 일본으로 망명 아닌 망명도 떠났다. 김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권 이사장이 국내에 있는 것 자체로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귀국 후 정치활동을 재개했지만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이 주도한 새정치국민회의 ‘정풍운동’으로 2선에 물러나기도 했다.

2016년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을 선언했지만 그해 국민의당에 입당했다. 국민의당이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으로 분당되자 평화당으로 옮긴 뒤 지금까지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서울=김현수기자 cr-2002@sr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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