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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8>마한 정체성, 김헌창 난으로 표출되다(中)
입력 : 2019년 08월 26일(월) 11:15


수백 년 전 사라진 가야 왕조 향수 통일기에도 여전
신라 9주 5소경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금관가야계는

법흥왕 때 신라에 복속된 후 진골 귀족에

편입된 신귀족으로, 통일신라 초기에는

국왕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렇지만 경주중심의 진골 귀족으로부터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 하대에 들어 정치적으로

몰락한 모습이 뚜렷이 나타난다

이에 따라 김유신계의 불만이 점차 노골화되고

있음은 당연하다. 삼국유사에 있는

‘미추왕 죽엽군’ 설화가 이를 반영해주고 있다

이러한 불만이 옛 가야에 대한 향수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김헌창 난은 신라 헌덕왕 14년(822) 3월에 발발하였다. ‘삼국사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논리 전개상 필요한 부분을 인용하여 보기로 한다.

①3월에 웅천주 도독 김헌창은 아버지인 주원이 왕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長安(장안)이라 하고, 慶雲(경운) 원년이라 建元(건원)하였다.

②무진·완산·청·사벌 4주 도독과 국원·서원·금관사신 및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 소속으로 삼았다. 청주도독 향영은 퇴화군으로 탈주하였고, 한산·우두·삽량·패강·북원 등은 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아 군대를 일으켜 스스로 지켰다. 18일 완산長史 최웅, 州助인 아찬 정연의 아들 영충 등은 왕경으로 도망하여 이를 알렸다. 왕은 즉시 최웅에게 급찬과 함께 속함군태수를 제수하고, 영충에게는 급찬을 제수하였다.(하략)

웅천주(공주) 도독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이유와 무진주(광주)와 완산주(전주)·청주(강주:진주) 사벌주(상주) 지역이 난에 가담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김헌창의 난은 그의 父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데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라 37대 선덕왕 후계를 둘러싸고 무열왕 계통인 김주원과 내물왕 계통인 김경신이 무력 충돌하였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김경신이 원성왕이 되었고, 패배한 김주원은 명주(강릉) 땅으로 물러나 ‘명주군왕(溟州郡王)’을 자처하며 지냈다. ‘삼국유사’에 자세히 나와 있다. 김주원이 왕위에 올랐다면, 김헌창이 응당 왕위를 계승하였을 것이다. 이에 김헌창이 불만을 품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김헌창이 도독으로 있는 웅천주를 비롯하여 무진주·완산주·청주·사벌주 등 9개 주 가운데 무려 다섯 주, 그리고 5소경 가운데 국원·서원·금관소경 등 세 소경이 가담하는 등 신라 대부분 지역이 반란에 가담한 까닭은 석연치 않다. 이들 지역이 난에 가담한 것을 ‘김헌창의 위협’ 때문이라고 삼국사기에서는 말하였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들 지역이 김헌창의 거병에 뜻을 같이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김헌창은 중앙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견제받았다. 원성왕계가 김주원계를 포용하는 과정에서 잠시 시중(侍中) 직을 역임하였으나, 몇 개월 못하고 바로 무진주 도독으로 좌천되었다. 무진주 도독 1년 8월, 청주(진주) 도독 5년 4월 등 7년을 웅천주 도독으로 부임하기 이전에 지방 장관으로 있었다. 국무총리직에 해당하는 시중을 역임한 인물을 장기간 도지사급에 해당하는 관직에 임명한 것이다. 김헌창에 대한 견제가 심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차별적인 인사는 김헌창 개인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 권력이 헌덕왕 3형제에게 집중되면서 권력에서 소외된 세력들이 중앙에서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이러한 특정세력의 권력 독점은 같은 중앙귀족 내부에서, 그리고 중앙과 지방 세력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이 무렵 충청·전라도 지역 곧 옛 백제·마한 지역에 가뭄 등 천재지변이 연속되면서 기근이 심하였다. 도적들이 들끓고 심지어 아이를 매매하는 등 사회·경제적으로 심각한 문제들이 나타났다. 이는 지역민들의 불만이 폭발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불만을 김헌창이 이용하였다고 보겠다. 그런데 반란이 일어난 지역이 천재지변과 무관한 지역에서도 일어났다는 점에서 기근 등으로 인한 민심 이반이 난의 이유라고만 볼 수 없게 한다. 여기에 김헌창 난을 살펴보려는 의도가 있다 하겠다.

김헌창의 난에 대응하는 9주 5소경의 대응 태도를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김헌창이 도독으로 있던 웅천주를 거점으로 무진·완산·청·사벌 4주 및 국원·서원·금관의 3소경은 직접 난에 가담하였다. 반면 한산·우두·삽량주와 북원소경 지역은 난에 동참하지 않았는데, 이들 지역은 난이 일어날 것을 ‘先知(미리 알고)’하여 군사를 일으켜 관할 지역을 지켰다 한다. ‘미리 알고’의 표현으로 보아, 이들 지역은 김헌창으로부터 난에 동참할 것을 미리 제의받았으나 거절하고 중립적인 처지에 있었지 않나 추정된다. 김주원이 물러나 있던 명주와 남원소경의 입장은 드러나 있지 않다. 같은 지방 세력이라 하더라도 난에 대응하는 태도가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헌창 난의 참가 범위가 매우 광범하다는 점이다. 왕경 편에 확실히 선 삽량주를 제외하고 지방과 중앙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전국적 규모로 난이 확대된 것은 신라 중앙정부에 대한 불만이 그만큼 깊어졌음을 시사한다.

김헌창이 주의 도독이나 소경의 사신 및 군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난에 가담하였다고 표현되어 있으나, 지리적인 거리 등을 고려할 때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사벌주(상주)나 청주(진주)는 오히려 왕경과 가깝고 반란이 일어난 웅천주(공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단순히 협박 때문에 난에 가담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왕경과 가까운 금관경(김해)이 난에 가담한 것은 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김헌창의‘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난이 일어났다는 삼국사기 기록은 ‘난’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여 실상을 호도하려는 신라 정부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王京인 경주와 가까운 지역이나 삽량주는 난에 가담하지 않고, 사벌주와 금관경이 난에 가담한 것은 난의 성격을 유추해 내는 데 도움을 준다. 같은 왕경의 관할 지역에서 각기 다른 행보를 하고 있다. 말하자면 옛 통일 이전 신라 지역의 삽량·사벌·청주 가운데 사벌과 청주 두 주는 난에 가담하였으나 삽량주는 제외되고 있다. 그런데 난에 가담하지 않은 삽량주의 중앙에 섬처럼 갇혀 있는 금관경은 난에 가담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원래의 신라와 가야 영역 가운데 삽량주 외에는 모든 지역이 난에 참여한 셈이 된다.

삽량주는 난에 가담하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 섬처럼 있는 금관경이 난에 가담한 것은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금관가야계는 법흥왕 때 신라에 복속된 후 진골 귀족에 편입된 신귀족으로, 통일신라 초기에는 국왕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렇지만 경주중심의 진골 귀족으로부터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 하대에 들어 정치적으로 몰락한 모습이 뚜렷이 나타난다. 이에 따라 김유신계의 불만이 점차 노골화되고 있음은 당연하다. 삼국유사에 있는 ‘미추왕 죽엽군’ 설화가 이를 반영해주고 있다. 이러한 불만이 옛 가야에 대한 향수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答설인귀書’라는 외교문서를 쓴 강수는 역사교과서에도 실려 있어 독자들에게 익숙한 인물이다. 삼국사기에는 그를 ‘임나가야인’이라고 적고 있다. 수백 년 전에 사라진 가야 왕조에 대한 향수가 통일기에 여전히, 또는 새롭게 나타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통일신라에 들어와 가야계 일부에서 ‘임나왕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고구려에 대한 향수도 적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흥덕왕 2년(827) 3월에 고구려 승려 구덕(丘德)이 당나라에서 불경을 가져 왔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구덕이 고구려계임을 알 수 있겠으나, 굳이 ‘고구려승’이라고 하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데서 멸망한 고구려 왕조에 대한 기대와 향수가 여전함을 알 수 있겠다. 이러한 옛 왕조에 대한 향수(鄕愁) 곧 정체성이 ‘난’으로 나타난 것은 아닌가 한다. 시민전문기자(문학박사·초당대교양교직학부초빙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