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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9>마한 정체성, 김헌창 난으로 표출되다(下)
입력 : 2019년 09월 16일(월) 11:00


무주·완산 지역민들, 경주중심 정치에 강력 반발
남원 가야 고분(인월 유곡리)
김헌창의 난에서 옛 왕조 부활을

희구하는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자

경주왕경 세력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결집력을 발휘하며 속전속결로

난의 진압에 나섰다. 이어 중앙 정부는

난에 가담한 지역에 대한 정치적 유화책을 썼다

1만이나 되는 군사를 동원할 힘을

부여한 것은 무주 지역에 형성된 강고한

마한의 정체성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통일신라가 ‘一統三韓’을 표방하였지만, 오히려 골품체제를 중심으로 경주중심의 정치가 더욱 강고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삼국통일에 결정적 공을 세운 김유신 가계조차 정치적으로 몰락하는 상황이 이를 함축해준다. 중앙과 지방, 경주와 非경주, 신라와 非신라의 갈등이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깊어졌다. 김유신 식읍이 있었던 금관경 지역의 정치적 박탈감은 쉽게 상상이 된다. 금관경 지역이 김헌창의 난에 동참한 이유라 하겠다. 가야계의 신라 중앙 정부에 대한 반발은, 국원소경(충주)이 김헌창 난에 가담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漢州는 난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에 영속된 국원소경은 난에 가담하였다.

국원소경이 가담한 것은 그곳의 특수성과 관련이 있다. 국원소경은 대가야 멸망 전후로 대가야 유민을 이주시켜 만든 특수행정구역이다. 대가야계로 두드러진 활동을 한 우륵이나 강수의 출신지이다. 국원 주민들은 가야계에 대한 신라 정부의 차별이 점차 심화 되는 것에 불만을 가졌을 법하다. 이러한 불만이 김헌창 난 가담으로 표출된 것이라 여겨진다. 옛 고구려 주민도 고구려에 대한 향수가 여전하였다. 827년 입당한 승려 구덕을 고구려 승려라고 표기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난 지 불과 3년 후(825) 김헌창 아들 김범문이 고달산(경기도 여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옛 고구려지역에서도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옛 고구려지역이 신라 중앙 정부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옛 고구려지역에 속한 한산·우두주(삭주)와 북원소경(원주)은 김헌창 난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들 지역은 난을 ‘예측하고(先知)’ 군사를 일으켜 방비하였다고 되어 있다. ‘예측하고’라는 데서 사전에 김헌창이 이들 지역과 교감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지역이 옛 고구려지역에 속하면서도 김헌창의 난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곳에 파견된 지방관이 친정부적 인물일 가능성과 기근과 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적어 불만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같은 한주에 영속된 국원소경이 난에 합류하였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필자는 이 지역의 특수성에 주목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 지역은 통일 이전에 백제, 고구려, 신라로 그 지역의 영유권이 넘어갔다. 말하자면 삼국의 힘이 충돌한 지역이었다. 마한이나 가야처럼 그 지역 특유의 정체성이 형성될 여지가 없었다. 이를테면 이들 지역은 신라에 대한 정치적 불만이 상대적으로 약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달산에서 일어난 김범문 난 역시 그 지역 고구려계 불만의 표출이라기보다는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본다.

이러한 추론은 남원소경이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리적 위치를 고려할 때 청주 안에 있는 서원경이 난에 가담한 것처럼 완산주 영역 안에 있는 남원소경도 난에 가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완산주 경역 안의 남원은 반란의 거점인 웅진에 가깝고, 반란에 가담한 무진주와도 가까워 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전혀 반란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때문에 이를 기록상의 잘못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록의 누락으로 볼 근거도 없거니와 오히려 남원소경이 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기록은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남원소경은 원래 고구려 유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세운 보덕국이 멸망한 이후 그 지역주민들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된 지역이다. 남원 지역은 고구려계 주민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 문화가 뿌리내린 곳이라 하여 일찍부터 주목되었다. 따라서 고구려계 유민이 대부분을 차지한 남원소경은 김헌창의 난에 다른 지역 고구려 유민들과 보조를 같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있다. 말하자면 옛 고구려 지역인 한주 지역이 가담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남원소경도 난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남원소경에서 김헌창의 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것은 고구려계 유민들이 그곳에 있어서가 아니라 한산주처럼 그 지역이 지닌 지역성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남원 지역은 옛 마한 지역의 전통이 남아 있는 곳이다. 가야세력과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그 지역은 마한·가야의 문화적 특성이 뒤섞여 있는 점이지대이다. 곧 마한의 정체성도 다른 마한 지역보다 미약하다.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마한 세력을 견제해야 할 신라 중앙 정부는 고구려 세력을 수백 km 떨어진 남원 지역으로 이주시켰다고 본다. 이러한 남원의 특성으로 인해 마한·가야·고구려 등 어느 한 나라의 정체성이 뚜렷이 드러났다고 보기 곤란하다. 한주처럼 이러한 정체성의 혼돈이 김헌창 난에 쉽게 반응하지 않은 까닭이라 하겠다.

이렇게 보면 김헌창의 난에 임하는 각 지역의 주와 소경들은 각 지역의 현실적 상황이나 역사적 배경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순히 난의 본거지인 웅천주와의 거리 문제가 아니라 각 지역이 처한 정치적·사회적·역사적 배경에 따라 난에 가담 여부가 결정되었음은 분명하다.

김헌창이 난을 결심하였던 것은 무주 도독을 역임하며 이 지역에 강고하게 형성된 마한 정체성을 주목하였을 법하다. 무주나 완산 지역주민들은 경주중심의 정치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게다가 연속된 흉년으로 민심이반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경주중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신라 사회의 모순을 김헌창은 꿰뚫고 있었다. 김헌창은 이를 이용하여 ‘장안’이라는 국호를 표방한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 하였다. 그러면 많은 非 경주 세력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결속할 것으로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살핀 바처럼 마한계, 백제계, 가야계, 고구려계 등으로 나누어져 있는 각 지역의 지향하는 바는 일정하지 않았다. 특히 그 지역의 정체성의 밀도에 따라 난의 가담 여부도 결정되었다. 그런데 김헌창이 새로운 사회를 지향한다고 하였지만 각 지역이 지닌 차이를 하나로 엮으려는 노력이 부족하였다. ‘장안’이라 하여 唐과 대등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만 표명하였을 뿐이다. 이것만으로는 각 지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당의 공격으로 멸망한 백제나 고구려 유민들에게 당의 서울인 ‘장안’을 국호로 삼은 것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헌창 군대 또한 각기 분산된 것이어서 진압군의 공격에 쉽게 무너지는 한계를 드러냈다.

반면 김헌창의 난에서 옛 왕조 부활을 희구하는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자 경주왕경 세력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결집력을 발휘하며 속전속결로 난의 진압에 나섰다. 이어 중앙 정부는 난에 가담한 지역에 대한 정치적 유화책을 썼다. 난에 가담하여 체포된 지방 세력들을 곧장 사면하였다.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존하여 가야세력을 달랬다. 무주 지역에는 청해진과 같은 독자적 군진을 허락하였다. 1만이나 되는 군사를 동원할 힘을 부여한 것은 무주 지역에 형성된 강고한 마한의 정체성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중앙 정부의 회유책은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점차 상실되어 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바야흐로 후삼국 정립 기운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옛 마한이 자리하고 있다.시민전문기자 (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